기독교 신앙으로 <고산자, 대동여지도> 보기 : 길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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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산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얽힌 일화를 다룬다. 역사적인 인물과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나 역사적인 사실보다 허구가 더 많이 가미된 팩션(faction=fact+fiction)이다. 박범신의 역사소설 고산자를 원작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워낙 김정호 관련 정보가 적다보니 박범신 역시 상상에 따른 서술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강우석 감독은 역사를 재현하려는 의도보다 대동여지도에 담겨진 김정호의 지도 철학에 천착하여 그것의 현대적인 의미를 부각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제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라는 일부의 평가는 영화에 대한 바른 평가가 아니다.

물론 김정호에 대한 역사학계의 의견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도제작 능력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 무명의 김정호를 부각시켰다는 설도 있고, 일본의 지도 제작과 비교할 만한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록도 별로 없는 김정호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하고, 김정호가 직접 발품을 팔아 지도를 제작했다기보다는 당시 출판된 지도들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제작했다는 설도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없는 독도(우산도)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 대동여지도의 화룡점정처럼 묘사한 것은 영화가 다분히 애국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겨냥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영화에 조선의 지도제작능력을 폄하하는 면이 없지 않고, 또한 당시 지도를 두고 전개된 것으로 표현된 권력싸움의 모습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사관을 반영한다는 비판도 있다. 영화가 역사학계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반영하지 못한 것은 다소 아쉽다.

 

그러나 감독이 무엇보다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게 된 동기이다. 당시 잘못 표기된 지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 목숨을 잃어야 하는 현실을 김정호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먼 길을 오가는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주고 또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요량으로 김정호는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어느 길로 가야 가장 효율적으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하던 시대에 김정호는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데까지 그리고 백두산에서 마라도까지 전국을 직접 다니면서 백성들을 안내해 줄 길을 그린 것이다. 지도는 1861년에 초간본으로 제작되었고, 1864년에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재간본이 발행되었다. 세로 6.7m, 가로 3.8m 크기의 지도였는데, 목판으로 제작하여 인쇄가 용이하도록 하였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22첩으로 구성된 분첩절첩식으로 만들어져 휴대가 쉬울 뿐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화 속 김정호(차승원)는 딸의 성장과정도 잊을 정도로 지도 제작에 전념했고, 당시 권력의 대세인 흥선대원군(유준상)이 지도는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며 대동여지도의 목판을 강하게 요구할 때에도 제 나라 백성을 못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지도가 필요한 백성들이 언제든지 쓰게 할 일념으로 만든 지도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목판을 내놓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지도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얻어 세력을 휘두르려는 것을 처음부터 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는 안동 김씨(남경읍)와 흥선대원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에서 대동여지도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광화문 광장에서 공개하도록 연출하였는데, 이는 김정호가 초지일관 모든 백성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는 데에 관심이 있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전국의 길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 소통, 개방, 공유로 압축되는 웹2.0 철학의 정신은 이미 김정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담긴 동기와 함께 그의 지도()에 대한 철학을 제시하였다. 영화 속 명대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말을 인용하면, “길 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이 있을 뿐”. 김정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었지만, 대동여지도에 담긴 정신을 현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다분히 오늘날 한국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권력자들과 부유한 자들이 걷는 길과 서민들이 걷는 길의 차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2.

영화의 현대적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길에 관한 철학적 종교적인 의미에 관해 좀 더 살펴보자.

플라톤의 <국가> 7권에는 동굴의 비유가 있다. 지하 동굴에서 있는 사람들은 사슬에 묶인 채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볼 수 있다. 그림자 이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은 비로소 자신들이 참된 실재가 아닌 그림자만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플라톤은 이런 비유를 통해 감각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재의 세계인 이데아계의 존재를 확신하고 돌아설 것을 촉구하였다.

동굴의 비유를 읽으면서 드는 의문 한 가지, 동굴 밖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동굴로 다시 돌아가 참 실재의 세계로 가는 길을 알려줄까? 아니면 동굴 속의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발견한 세계에 빠져 실재의 세계를 누리며 살까? 아니면 그림자를 실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실재 세계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동굴 밖으로 나오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는 대가를 받으며 살까? 플라톤은 첫 번째를 철학자의 길로 삼았다. 이에 비해 세 번째 방법을 택한 사람은 소피스트이다. 그들은 돈을 받고 지식을 얻는 방법과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식을 가르쳤다. 두 번째 길을 택한 사람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개인의 해탈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그림자와 실재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고 한층 더 나아가서 어떻게 감각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실재세계에 이를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 철학은 단지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에게 구원은 이성적인 직관을 통해 얻는 지식을 통해 갈 수 있었다. 지식인의 길이었고, 철학자의 길이었으며, 영지주의는 이것을 종교적으로 인지하여 태동한 것이다. 이성적인 직관을 통해 얻는 지식이 신비의 지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유대인들은 진리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였다. 구원을 염려하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을 누리며 사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표시이고, 불행한 삶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자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배제된 자로 여겨졌다. 곧 죄인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성전마저 무너진 상태에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현실에 놓였을 때, 그들은 그 원인을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이방 나라의 통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한 걸까? 이런 질문으로 고심한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진리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 되는 때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나 율법을 갖고 있고 또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방법을 구원의 도로 삼았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선, 곧 구원을 위해선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선포는 매우 혁명적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을 통해 임했다고 선포했고, 자신을 믿는 자, 곧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선포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 모양새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바뀐 것에 불과한데, 양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선한 행위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면(5:1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유대교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무엇이 다를 것인가?

 

누구보다도 이런 질문의 의미를 의식하고 양자의 차이에 주목하여 신학적인 성찰을 전개해나간 사람은 유대교에서부터 예수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유대교는 현실에서 의인으로서 살아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사도 바울에 따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들 역시 성도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해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죄인들을 의인으로 칭해주신다고 믿는다. 이런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종교개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중세 가톨릭은 유대교 전통을 충실하게 받아들였지만, 과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따랐던 사람들과 종교개혁 이후 태어난 개신교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단순히 중세 가톨릭으로부터 분리가 아니라 초대교회 전통을 잇는 노력으로 여겨진다.

 

예수의 길은 당시에 결코 의인이라고 여겨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준 복음이며 또한 해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의 대상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음을 열어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구원의 길은 유대인이나 세상에서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분명해졌다. 곧 영생으로 가는 길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굳게 닫혀져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영생을 얻으려 노력한다 해도 좌절을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길은 다시 열렸으며,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성령을 통해 주입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여타의 길과 달리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구세주로 믿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길이다. 그 길은 성직자들이 독점할 수 없고 또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길이며, 그 길을 알고 있고 또 길을 인도해준다는 이유로 권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비밀스런 정보인양 가장해서 치부하는 일에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 <고산자>는 비록 외연적으로는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진 않아도, 감독은 서학(가톨릭)에 대한 박해 장면을 삽입해 넣음으로써 두 의미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내연적으로는 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길의 의미를 잘 보여준 영화라 생각한다. ‘길의 철학은 서학의 도와 연결되면서 결과적으로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길을 내포한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3.

이제는 영화의 현대적인 의미에 접근해보자. 대한민국은 정의를 외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구원을 부르짖는 상황에 와 있다. 국민들이 정치적인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접할 수 없도록 언론을 통제할 뿐 아니라, 권력자는 불의를 비호하려고 할 뿐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권력과 자본이 결탁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것이 용인된 사회에서 더 이상 정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길에는 빈부와 귀천이 없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걷는 길과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걷는 길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잘 포장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험한 자갈 밭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위 출세를 뒷받침해줄 배경이 없어 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온갖 특혜로 출발점이 다르니 언제나 뒤질 수밖에 없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악용하는 사례만 늘어날 뿐이다. 늘어나는 가계 부채와 가난으로 허덕이고 불의에 신음하는 국민들이 생존을 위해 구원을 부르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우석 감독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담긴 길 철학을 이 시대에 부각시킨 까닭은 아마도 이런 한국사회의 현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지 싶다.

 

예수의 혁명적인 선포를 대동여지도에 담긴 철학에서 재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편으로는 새롭게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선포와 김정호의 길 철학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 속히 도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주께서 애굽의 압제에 눌려 지내던 히브리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듯이, 한국 사회에서 부와 권력에 억눌려 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길!


최성수 박사가 본 <고산자>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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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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