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영화 <곡성> 읽기 : 주체성을 상실한 자들의 종말




1.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끊임없이 유발하여 영화에 관한 수많은 담론을 만들어내었다면 흥행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논쟁마저 일어난다면 금상첨화다. <곡성>은 관객들의 궁금증과 논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SNS와 온라인 오프라인의 대화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내용 자체가 이해되지 않고, 캐릭터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말이 많다. 이 정도 평가면 웬만한 영화들은 스토리텔링에 문제가 있다 하여 꼬리를 내리게 되는데, <곡성>은 더욱 더 많은 관객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호오가 분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라는 차원을 넘어 전례를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무엇 때문일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는 단지 종교적인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기보다는 기독교 상징들이 영화에서 의미작용을 위해 비중 있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구절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활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의 사이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실 필자 역시 영화내용 자체가 정리되지 않았고,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 구절로 시작하지만 무속의 틀 속에 들어 있는 것부터 보다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관객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탓인지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얼개와 캐릭터의 의미에 대한 정보를 공개했다. 인터뷰 기사를 본 후에 나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을 떠올렸고, 차라리 인터뷰를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감독의 영화 이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 싶었다. 왜냐하면 단순히 스포일러성 정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도상성과 지표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품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적인 모티브가 사용되었어도 신학적인 성찰은 부족했다. 영화 이해에 도움은 되었지만, 영화 자체에서 받은 불친절함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2-1.


[글의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의 줄거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종구(곽도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어느 시골 마을(전라남도 곡성이 아니다)에 의문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과학수사결과 원인은 정신착란과 피부병을 유발할 수 있는 버섯 때문이라고 밝혀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단순히 버섯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며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 와중에 마을에는 얼마 전부터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돈다. 경찰관 종구(곽도원)는 처음에는 수사 결과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동일한 패턴의 사건(피부병, 살인, 굿의 흔적 등)이 반복적으로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딸에게 일어난 범상치 않은 일을 경험하면서부터 태도가 급변한다. 더 이상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일본인에 대한 소문에 귀를 기울인다. 딸에게 일어난 증세를 보건대, 마을에서 발생한 일련의 피부병과 살인 및 사망 사건들이 단순한 버섯의 부작용만은 아닐 거라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외지인인 일본인이 머물고 있는 집에서 발견한 이상한 물건들 때문에 종구는 일본인이 사건의 배후임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종구의 딸에게 나타나는 이상한 증세 때문에 외할머니는 종구에게 용한 무당을 소개하고, 박수무당 일광(황정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광은 딸의 이상 증세에서 심상치 않은 살()을 확인하고, 심지어 소문 속의 일본인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살을 쫓기 위한 굿을 할 것을 제안한다. 일광이 부두교적인 의식이 섞인 굿을 하는 동안 딸은 고통을 겪으면서 심한 경련에 시달린다. 축사 의식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딸이 더욱 고통스러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종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굿을 중단시킨다. 그 후 굿에 의지하길 포기한 종구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일본인을 직접 처리하려고 한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시체를 발견하여 유기한다.

굿을 중단한 후에 종구와 연락을 시도한 일광은 전화로 연락이 되지 않자 직접 찾아간다. 그리고 종구 집 앞에서 무명의 여인(천우희)을 만나는데, 그녀의 한 마디에 포복절도하는 경험을 하고는 성급히 서울로 도주를 시도한다. 그러나 무언가에 의해 가는 길이 방해되자 다시 돌아와 종구와 연락을 취한다. 종구 집 근처에서 이상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의 말을 절대 듣지 말 것과 집으로 돌아가서 딸 곁에 있으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무명의 여자는 종구에게 집으로 가면 모두가 죽는다며 닭이 세 번 울 때 까지는 가지 말라 한다.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에 대해 갈등하며 주저한 종구는 결국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일광의 말을 듣는다. 종구는 집에서 딸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 본인도 거의 정신을 잃는 상태가 된다.(그가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2-2.

만일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면, 영화는 인간의 의심(욕망)이 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종구가 과학적인 수사 결과를 받아들인 처음의 입장에서 갑자기 돌변한 계기는 자기 딸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종구는 아버지로서 딸에게 나타난 증상이 버섯과 상관없는 일임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딸의 몸에서 발견된 피부병과 딸의 노트에서 발견된 기이한 형상의 그림들은 딸이 누군가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는 강한 확신을 불러 일으켰다. 부부가 자동차에서 행한 성관계를 딸이 지켜본 것에 대해 영화는 매우 이상스러울 정도로 긴 시간을 할애한 것을 보면, 딸에게 일어난 성 관련 해프닝은 처음이 아니면서도 또한 예사로운 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종구는 마을에 도는 소문과 의심을 직접 확인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마을에 등장한 낯선 자 일본인은 희생양으로 적격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종구는 일본인이 거주하는 곳을 찾아갔는데,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 후 종구는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었을 뿐,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여기에다 일광마저 사태의 원인을 일본인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그의 확신은 거의 종교적인 신념에 가까웠다. 의심만 했던 때에는 마을을 떠나라고 위협만 했던 종구는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그를 죽일 것을 주저하지 않은 태도로 바뀌었다. 일본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귀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일광을 거의 종교적인 태도로 신뢰하고 있던 터라 종구는 무명의 여인의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일광이 말한 대로 여인을 의심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3.

이런 이야기 얼개는 영화를 조금만 주의 깊게 감상하고 또 사건과 캐릭터를 서로 연결할 수 있으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외연에 해당한다. 의심(욕망)에 사로잡히면, 진실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자신이 확신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현상을 폭로하는 영화로 이해된다. 일종의 '라쇼몽 효과'를 말하는 것일까? 전염병의 원인을 알지 못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종교적인 힘에 의지할 요량으로 희생양을 내세웠던 중세의 마녀사냥을 연상케 한다. 아무튼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게 정리할 수는 있다 해도 이야기가 시원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것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전체를 이해하고 난 후에 리뷰를 쓰는 경향이 있는 필자는 캐릭터 연결이 어려워 영화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

무엇보다 좀비가 등장하고, 박수인 일광을 꼼짝 못하게 만든 무명의 여인은 끝까지 베일에 감춰져 있고, 죽었던 일본인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나, 일본인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 있는 부제가 일본인이 있는 동굴로 찾아가서는 그가 악마인지를 확인하는 장면 등은 앞에 언급한 이야기로 영화를 정리하고 싶은 필자를 큰 혼동으로 몰고 갔다. 왜냐하면 이들 캐릭터는 영화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영화 의미작용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 이야기와 인용된 성경구절 그리고 의문의 캐릭터와의 관계, 그리고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과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으면 영화 이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누가복음에 있는 성경 구절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경의 모티브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혹시 여기서 이해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 종교적 분위기로 가득한 영화에서 기독교적인 모티브를 사용했다는 것에서 다분히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첫 자막에 등장한 것은 종교적인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의심하는 그들에게 하신 책망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무명의 여인은 종구의 행동을 닭이 세 번 우는 것과 연결시켰고, 죽은 후 다시 살아난 일본인을 찾아온 부제 앞에서 갑자기 악마의 모습으로 바뀐 일본인의 입에서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하신 부활의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들은 영화에서 어떻게 의미 작용을 하는 것일까?

인용된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영화를 살펴보면, 물질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의 현존을 의심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에 관한 영화임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수사 결과를 의심하고 오히려 영적인 현상으로 확신하는 것은 비록 현대사회에서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 것임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영화 속 무명의 여인과 일본인 그리고 일광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일본인과 일광 모두 무명의 여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영화의 감독판을 이야기하는 내용에서 들은 바로는 일본인과 무명인과 싸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편집되었다고 한다. 감독판에는 이 장면을 넣을 생각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무명인과의 관계에 비춰서 이해한다면, 그녀는 비록 이름은 없지만 선한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캐릭터이면서도 이름이 없고, 그것이 영적인 존재라면 그녀는 분명 신적인 존재를 형상화한다. 토속 신앙에서 이름 없는 신은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에 의해서도 좌지우지되지 않는 신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히 행해진 일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잘 알고 있다.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또 중요한 일에 등장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신은 누구일까? 만일 감독이 기독교적인 상징을 동원해서 이런 신을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읽기를 원했다면, 하나님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 상징을 토착화하여 영화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매우 독창적인 시도라 생각한다. 삿갓 쓴 예수를 그림으로 표현한 운보 김기창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이것은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밝힌 대략적인 캐릭터를 밝힌 후에 도움을 받아 재구성한 이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 사실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접한 후에 필자의 고민은 해소되기보단 더욱 커진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감독의 설명에 따른 이해가 적어도 신학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독은 기독론적인 관심에서 영화의 캐릭터를 형상화했다고 말한다. 일본인은 유대인에 의해서 배척당한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 했다.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부활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존재로 여겨진 예수님을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 의해 배척당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신학은 반유대주의의 사상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인간에 의해 배척당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일본인이 외지인으로서 같은 마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의 대상이 되고 또 배척되었다는 영화의 내용과 일치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마치 외지인 취급을 받은 까닭은 그들이 예수의 말에 찔림을 받았음에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대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마의 형상으로 변한 일본인을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신 모습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반영하는 것으로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도상적(icon)으로나 지표적(index)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과 유사하지도 않고, 추론을 통해서도 상호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4.

어찌되었든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는 서사 전개에 초점을 두고 제작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감독은 오히려 인간의 시선에 따라 구성되는 이야기를 전개했다.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딸의 이상 행동을 보는 아버지의 시선, 그리고 외지인을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등에 초점을 두고 제작된 영화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지각의 차이에 따라 사실이 어떻게 보이는 지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캐릭터로 형상화하고 그것과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곧 낯선 자에 대한 시각은 일본인을 귀신으로 변형시켰고, 부제의 시각에 따라 일본인은 악마로 변형되었고, 사실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 따른 시각이 무명인에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길가에 쭈그려 앉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지각에 따라 변형되는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서 필자는 한편으로는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되는 통찰을 얻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독의 설명과 다른 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예컨대 박수 무당 일광과 일본인의 관계는 단순히 협력자로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동일 인물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순 없을까? 물론 단서는 일광과 일본인이 공유하는 사진과 사진기 그리고 두 사람이 동일하게 입고 있는 훈도시(일본식 속옷)이다. 영화 말미에서 일본인이 부제 앞에서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 또한 중요한 단서이다. 곧 외지인 일본인은 외지에서 온 정신에 대한 지표이고, 일광은 한국인으로 육화된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순 없을까? 이렇게 되면, 한편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사건들)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외부의 탓으로 돌리며 마음과 시간을 다 빼앗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박수무당 일광을 끌어들인 여성들은 그에게 피해를 당한다(피부병은 접촉을 상징하기에 그와의 성적 접촉을 암시한다)는 이야기로 기술할 수 있다. 그 피해는 개인으로 그치지 않고 상호 의심과 반목을 계속해서 부추긴다. 그리고 일광과의 관계에서 존재의 위력을 드러낸 무명의 여성은 한국의 역사를 지켜내고 있는 정신으로 생각해 보자. 쭈그려 앉아 있는 여성을 감독은 오늘날의 신의 모습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곡성>은 우리의 문제를 보고 또 해결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인 능력을 포기한 채 남 탓만 하고 지내다 결국 서로에 대한 반목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결국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드러낸다. 어쩌면 합리적이지 못하고 초월적인 힘에만 의지하려는 삶과 문제 해결과정에서 주체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삶이 맞이하게 될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묵시록은 아닐까? 오늘날 한국 사회와 겹쳐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악마와 예수와 동일시되는 마지막 장면은 이런 비주체적인 삶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역할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임을 폭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끝으로 <곡성>과 관련해서 회자하는 논란의 핵심은 영화를 이해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관객은 외연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최소한 외연이 확인되지 않으면 그것이 갖는 내연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곡성>은 최소한의 외연을 파악하는 일에서도 불친절하다. 비록 관객은 영화가 현실과 일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해도, 또 감독이 굳이 관객의 상상력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까닭은 없다 해도, 영화는 소통할 수 있기 위한 단서를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감독의 설명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소통을 처음부터 거부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고 또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영화적 장치를 동원한다해도 현실을 재현할 수 없다. 다만 영화는 현실에 대한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재현할 뿐이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길 원한다면, 아무리 예술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도상적으로나 지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곡성>에는 영화 미학적으로 뛰어난 표현을 관객에게 소통하게 해주는 각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론가들에 의해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없이 적어도 필자에게 <곡성>은 관객과의 소통에 있어서 참으로 불친절한 영화라는 인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미친 열정을 보인 배우들의 연기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성수 박사가 본 <곡성>은?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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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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