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영화의 고전들 <십계> - 누구에게, 어떻게 복종할 것인가?





왜 '고전(古典)'인가?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을 말하는 시대에 '고전'을 말합니다. 어제가 없이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 있을 수 없듯이 [성경 영화의 고전들]을 통해 내일을 위해 어제의 영화가 오늘의 기독교에 주는 메시지를 들어봅니다. - 편집자 주 


세실 B. 드밀의 성경 영화

2014년 말 <글래디에이터>(2000)의 거장 리들리 스콧이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들고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자주 1956년 개봉한 세실 B. 드밀의 영화 <십계>를 언급했다. 지팡이 대신 칼을 들고 싸우는 모세, 초자연적인 신비보다는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한 이적, 울림이 큰 목소리와 빛으로만 존재하는 권위적인 신 대신 작고 어리지만 단호하고 총명하게 따박따박 말하는 하나님이 등장하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가 혹시 낯설거나 불편했다면, <십계>에서 지팡이나 두 돌판을 번쩍 치켜든 찰턴 헤스턴의 이미지가 각인되어있기 때문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 볼 만 하다. 우리가 지닌 성경적 서사 영화의 전형에서 세실 B. 드밀의 영향이란 그만큼 각별하다.


세실 드밀의 영화 <십계>에서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르는 모세(좌)와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모세(우)


<십계> 중 불타는 떨기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좌)과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나타난 작고 어린 하나님(우)


<삼손과 데릴라>(1949), <왕중왕>(1927) 같은 성경 내러티브 영화로 유명한 세실 B. 드밀은 1923년에 이미 <십계>를 만들었다. 흑백 무성영화 시대에 드밀은 이 영화를 2단계 테크니컬러(두 가지 색에 감광되는 필름을 이용한 방식)로 제작해서 주목을 끌었다. 그는 대중성과 작품성, 성과 속의 경계에서의 줄타기에 능한 감독이었다. 예를 들어, <왕중왕>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는 영화지만 창부 막달라 마리아의 요염한 모습을 초반에 등장시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금 선정적이고 도발적이어도 괜찮다. 어쨌거나 그는 곧 예수님을 만나고 극적으로 회심할 것이다. 물론, 당대 관객들의 호기심과 욕망을 최대한 만족시킨 후에.

이러한 이유로 비난과 칭송을 동시에 달고 다녔던 감독 드밀은 작품에서 여러 모양으로 정색을 하고 스스로를 변호하곤 했는데, 1956년의 <십계>에서는 영화 시작 전 무대에 직접 등장해서 영화의 주제를 설명한다. 그가 밝힌 <십계>의 주제는 자유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것은 인간이 신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가, 람세스 같은 변덕스러운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인간이 국가의 재산인가, 신 아래 자유로운 영혼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율법이 왜 자유인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영화 <십계>는 모세와 출애굽의 이야기이다. 히브리인의 노예로 태어난 모세(찰턴 헤스턴 분)가 이집트 왕자로 자라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첫 부분과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거듭나게 되는 두 번째 부분, 드디어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건너 십계명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마지막 부분으로, <십계>는 크게 세 단계의 주요 플롯을 갖고 있다.

여기에 두어 개의 삼각관계를 배치해 멜로드라마 구성을 더했고, 친모를 유모 삼아 자랐으므로 모세가 이미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 거라는 기존의 성경해석과 달리 출생의 비밀이 적시에 폭로되는 식으로, 평범하고 익숙한 영웅서사의 틀을 취했다. 드밀의 모세는 또한 사람을 죽이고 도망한 것이 아니라 파라오의 권력에 위협이 되어 추방당했기에 할리우드 영웅에 최적화된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히브리인들의 생명력을 두려워하여 산파들에게 히브리 남아를 살해하도록 했던 파라오의 명령은 그 해 구원자가 탄생하리라는 예언 때문에 생긴 공포로 꽤 구체적인 모양새를 띄고 재현되었다. 1세기 예수님 시절 로마의 영아 학살을 연상시키면서 모세를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하게 하므로 이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각색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십계>자유의 탄생을 주제로 한다면서, 흔히 속박으로 여겨지는 율법(십계명)으로 서사를 마감한다. 이를테면 백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예언적 인물이 모세이고 그의 행적이 영화의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은 모세출애굽기가 아니라 십계. 왜 그랬을까?

시내산에서 40일 동안이나 내려오지 않아 죽은 줄 알았던 모세가 두 팔에 십계명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분노하는 모세를 향해 히브리인 노예 감독관이었던 데이탄(에드워드 G. 로빈슨 분)은 말한다. “우린 자유다.” 이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으니 섬길 신을 정하는 것도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도 그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에 대한 모세의 답은 단호하다. “법 없이는 자유도 없다.” 물론 여기서 이란 파라오 람세스의 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법이고 계명이다. 그들이 나고 자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곧 신이었으므로 모세의 이 선언은 더 특별했다. 하나님의 법 아래서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드밀의 모세는 말한다. "So it was written So it shall be done." 

 


영화 <십계>의 마지막에는 고대 스크립트에서 튀어나왔을 법한 텍스트 디자인으로, 이런 자막이 등장한다. "기록된 대로 그가 이루실 것이다." 반면, 파라오는 말끝마다 이렇게 덧붙였다. “So let it be written, so let it be done.” , "그렇게 기록하고 그대로 행하라."

신에게 복종할 것인가, 인간에게 복종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쩌면 그가 반드시 행하실 일에 순종으로 동참할 것인가, 무조건 자기 뜻대로 되게 해야 한다고 우기고 억압하는 누군가의 요구와 명령에 따라 아등바등 살 것인가의 문제일지 모른다. 무엇이, 어떤 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세실 B. 드밀은 서두의 발언에서 똑같은 투쟁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도 20세기 할리우드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질문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되물어야 할까. 우리를 압박하는 일에 대해 명령의 주체를 따져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일은 과연 누가, 왜 원하는 일인가. 나는 어떤 요청에 응답해야 마침내 자유로워질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뛰어든 사람들

 

에 대한 확신이 무너져가는 오늘날, 다시 드밀의 영화로 돌아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모세가 아직 이집트의 왕자였을 때, 파라오의 명으로 떠난 비돔의 도시 건축현장에서 모세는 돌에 기름칠을 하다가 옷자락이 끼어 죽을 뻔한 여인을 돕게 된다. 자신의 생모 요게벳(마샤 스코트 분)이었다. 이스라엘 지도자로 부름받은 모세에게 그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마치 출애굽기의 모세가 이집트인에게 억압받은 동료 히브리인을 살렸던 것처럼.

다만 노예로서의 이용 가치도 존재감도 보잘것없는 늙은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사람들의 면모는 좀 더 살펴보아야겠다. 모세에게 달려와 도움을 청했던 여인은 공사현장에서 노예들에게 마실 물을 나르던 릴리아(데브라 파켓 분)였다. 이집트인 감독관들에게 저항해서 요게벳을 죽음 직전에서 구해낸 여호수아(존 데릭 분)는 릴리아의 연인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여호수아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자인 히브리인 모세.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일에 기꺼이 몸을 던졌고 기꺼이 람세스의 법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른 사람들이었다. 결국 약속의 땅을 향한 대열의 선봉에 서게 된 이들도 그들이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중영화의 인과응보는 어울리지 않지만, 하여튼 영화 <십계>는 그들에게 일말의 선함과 선함에의 의지를 부여했다.

그런가 하면 모세의 양모 비티아(니나 포크)는 이집트인 임에도 불구하고 출애굽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온 작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용기였다. 모세를 발견한 당시 비티아는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컸다고 영화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든 상실감이 공감과 긍휼을 낳는 것은 아니다. 공감이 즉시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끝으로, 모세가 노예해방이라는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과업을 이집트의 방식으로 도모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둘 만 하다. (친모가) 노예로 생명을 준 것이 왕을 만들어주는 일보다 더 고마운 일이더냐, 물었던 양모 비티아는 모세를 설득하지 못했다. 왕이 되면 노예를 해방할 수도 있고 네가 믿는 하나님을 모두가 믿게 할 수도 있다던 연인 네프리티리(앤 벡스터 분)합리적이고 솔깃한 호소도 모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이 땅의 기독교 공동체를 유혹했던 설득의 기술(“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이 성공하고 잘 돼야한다”)을 우리는 이집트의 두 공주들을 통해 듣는다. 그들은 명백히 람세스의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이제 좀, 분명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그 어느 때보다 엑소더스(출애굽/탈출)’가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돌 틈에 옷자락이 낀 이 땅의 수많은 요게벳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최은 | 영화를 매개로 한 크고 작은 만남들과 글쓰기의 기회들에 감사한다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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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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