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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복지논쟁과 교회의 역할

성석환(문선연 객원연구원/안양대)

한국의 차기 총선, 대선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분명 '복지'이다. 지금도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을 두고 한 치 양보 없는 공방이 정치권뿐만 아니라 경제계나 문화계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성숙해지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제는 단지 법과 제도라는 형식적 틀만이 아니라 서민들의 살림살이와 생활복지의 수준이 향상되어야 할 간계에 와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 명분이나 역사적 대의보다는 일상적인 삶의 수준이 개인의 행복지수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유권자들의 욕구를 재빠르게 간파하고 최근 복지를 정치적 이슈로 삼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야 할 것 없이 복지정당임을 주장하면서 서민의 복지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말한다. 도식적으로 구분하면 한 쪽은 보편복지, 한 편은 선별복지를 주장하면서 전선을 넓혀가고 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같은 수준의 복지를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공적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전자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안 그래도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부자에게도 같은 혜택을 주기 위해 세금을 낭비하는 것은 복지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양 측은 서로 다른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 논쟁은 또 다시 전 국민을 양 쪽으로 갈라놓고 있다.

사실 정치권의 논쟁을 보면서 이들이 진정으로 국민의 복지를 걱정하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이 논쟁들은 복지예산의 배분이나 수혜대상의 범위 등에 대한 거시적 측면만 다루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복지로 실현되려면 아마도 꽤 시간이 흘러야 할 것처럼 보인다. 모든 논의를 편 가르기로 환원시켜버리는 꼴사나운 정치놀이에 일부 기독교 인사들까지 가세하면서 교계도 양 쪽으로 지지층이 갈라진다.

서구의 복지사회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20세기의 대공항과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국가가 공공정책을 복지적 차원에서 실행하여 자본과 인간의 욕망을 계획적으로 통제 혹은 권장할 필요성을 강력히 느끼게 되었다. 특히 끔찍한 전쟁의 기억은 도덕적인 것들과 공적인 것들을 보다 더 보편적인 가치로 고양시켜야 한다는 합의로 이끌어내었다. 근대시대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것들로 시작되었던 고로 사회적 공동체의 복원이 목표가 되었다.

적어도 60년대 신, 구세대의 문화적 충돌이 격렬해지기 전까지는 전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동의했기 때문에 공동체적 사회보장제도가 꾸준히 발전했다. 문제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그러한 명분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정의 등이 더 중요했다. 이전 세대가 공동체적 가치를 주장하면서도 아무런 명분 없는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나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인권문제 등은 국가의 과도한 역할을 의심하도록 했다.

결국 8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정책은 개개인의 자유와 국가역할의 축소를 내세우며 모두가 비슷한 수준의 경제규모로 살아가도록 하는 정책보다는 각자가 능력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원받는 능력본위의 정책을 더 효율적인 것으로 선호하게 되었다. 겉으로 볼 때는 이것은 경제정책의 전환이었지만 실제로는 지구사회의 가치적 전환이었고 이제 사람들은 이전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기억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미국발 경제위기는 다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었고 능력과 효율성에만 기대는 정책으로는 경제적 성장조차도 건실하게 진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버린 사회적 불공평과 빈부격차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안을 발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은 사회의 만연한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한꺼번에 이룬 보기 드문 나라로 주목받는다. 세계 1등 상품도 많고 문화적 역량도 대단하여 국가 브랜드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답답한 현실이다.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갈등이 높아지고 있으며 고용불안이 심각하여 양질의 일자리가 날로 줄어들고 있고 일부 계층의 사치와 낭비를 마치 이상적 삶인 것처럼 선전하는 천박한 태도가 만연하다.

기왕에 한국적 복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 자체는 다행이다. 또 이 흐름과 함께 기독교계에서도 최근 공공신학이나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 두 흐름을 연결하여 한국적 복지의 미래에 대해 몇 몇 단체나 기관에서 신학적 토론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의미 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개교회나 그리스도인 개인들을 이러한 논의와 실천에 어떻게 동참하도록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적 불공평이나 공동체적 삶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신뢰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실제적으로는 민간부문의 복지를 상당히 많은 부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회가 우리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보다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복지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교회가 무엇인가 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의 타락한 물신주의를 고발하면서 공적 대화를 복원하고 과거 유럽적 복지사회의 이상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토니 주트(Tony Judt)도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더 이상 특정 종교계의 일방적인 목소리가 권위를 가질 수 없는 다원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계의 도덕적 가르침과 공동체적 삶의 모범은 매우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한국적 복지실천에 동참하고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적 복지논쟁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주민의 참여나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는 지역공동체 형성 모델이 아니라 관주도의 일방적이고도 정책적인 차원에서의 논의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점에서 국가가 적절하게 자본을 통제하여 사회적 불공평을 해소하는 일에 재원을 투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과거 계획경제 시절처럼 국가가 모든 원칙과 룰을 정해주는 방식은 곤란하다. 이른바 거버넌스 형태의 논의구조와 지역주민 혹은 지역사회 주도의 실천구조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바로 지역사회와 주민의 주도적 참여를 방해하는 모든 자본논리를 차단하고 공정하고 공평한 실행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 교회가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지역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역의 현안을 교회의 선교적 과제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지역사회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이나 당국과의 의사소통에도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소외된 이들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와 돌봄에도 탁월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 모든 일은 한국적 복지논의의 질을 한층 높이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높여 선교적 의미도 크다.

교회는 여당의 안이나 야당의 안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지지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성경적인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에 서서 답해야 한다. 몇 해 전 빌 게이츠가 세계 최고의 석학인 하버드 졸업생들에게 그들의 지성과 실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세계에 만연한 불공평을 줄이는 일에 사용해 달라고 호소했던 것을 기억한다.

복지논쟁은 다만 정치적 논쟁거리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 원하느냐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하며, 교회는 무한대의 탐욕과 이기적 소비가 조장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성경적 가르침과 공동체적 가치를 중심에 두는 복지정책을 공론화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지금 세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후손들의 삶에 대해서 또 통일 이후 한민족의 미래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떤 당파적 치우침도 없이 이 논의에 기여할 주체가 필요한데, 시민사회나 지식인들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기여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아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본인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또 교회가 당장의 성장보다는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일에 재정적, 선교적 참여를 확대한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소모적 복지논쟁과는 다른 대안적 논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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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문화칼럼"/성석환 l 2011/07/26 11:11




우리에게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성석환(문선연 객원연구원, 안양대 기독교문화)

  한국은 20세기에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이룬 몇 안 되는 나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각종 국가 순위에서도 상위권이고 경제 규모도 10위권으로 인정받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활약과 스포츠 분야에서의 선전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변화시켜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역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고 있지만 유독 정치나 부패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공정한 사회'를 국정기저로 삼겠다고 밝혔다. 특히 고위공직자나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과 법의 공정한 집행을 강조하였는데, 출범 초기부터 부르짖던 선진사회로 가기 위해서도 '공정한 사회'라는 목표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이상일 것이다. 빈부의 격차 심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 부자 감세와 조세형평성 문제 등은 '공정한 사회'의 실천을 위해서 앞으로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들이 될 것이다.

'정의'를 묻는다.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는 현대 (미국)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정의'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사실 이미 고전적인 철학의 질문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를 거쳐 롤즈에 이르기까지 '정의'는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과 그 실천적 의미를 물으며 다양한 논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정의'는 여전히 질문을 제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상황을 전제한다. 그래서 정의는 윤리적 차원에서 규칙(rule)이 아니라 원칙(principle)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샌델은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몇 가지 사례들에 대한 시시비비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근대적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합리적 판단에 대한 맹신 때문으로 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예컨대 낙태나 부자감세 등에 대해서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판단과 주장은 생각하는 것처럼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개인적 주관이나 도덕, 종교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샌델의 말하려는 진정한 의도는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전에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이고, 또 그것에 대답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정으로 객관적인 규칙을 도출해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단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사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각 자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 주는 것인데,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의 세 가지 방식이 철학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행복, 자유, 미덕 이 세 가지는 정의를 고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암시하는 것이다.
  공리주의에서 정의로운 사회란 행복의 극대화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는 견해는 특히 정치 논쟁에 있어서 시장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방임주의와 공정한 기회와 평등을 강조하는 공평주의자들이 있다. 정의를 미덕, 즉 좋은 삶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입장은 주로 보수주의나 종교적 우파와 연관되어 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
 
공동체와 이야기

  샌델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근대의 자유주의가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중립적 판단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즉 선은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다. 중립을 강조하는 입장은 평등주의자나 자유지상주의자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도덕과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경우 희생과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해명하기 어렵다.
  즉 근대적 개인의 선택과 판단은 철저히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영향 아래에서 수행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의로운 삶이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연대와 충성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샌델은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공동체적 도덕을 고려하는 것이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곧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도덕적 부담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산다는 것인데, 우리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샌델은 이것을 '공동선'의 추구로 가늠한다. 좋은 삶을 지향하는 사회는 개인을 공동체의 일부로 보고 '공동선'을 추구한다. 그것이 곧 정의다.
  도덕과 가치를 배제한 중립적인 정의는 실제로 전혀 중립적이지 않고 반드시 특정한 입장이 개입되며 주로 기득권과 권력을 보호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시민 의식, 희생, 봉사, 연대, 미덕의 장려, 도덕에 기초한 정치 등이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선의 사회, 즉 정의로운 사회의 중요한 가치들이다. 서로 다른 도덕적, 종교적 이견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공적 삶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이 서로 경쟁하고 경청하고 학습해야 한다.
 
한국사회, 정의 그리고 교회

  지금 많은 독자들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열광하는 이유는 물론 최근 한국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적 관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현실에서 고전과 인문학적 지혜에서 생존의 길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상상력과 창조력을 강조하는 기업들에서도 인문학에서 그 원천을 빌려오는 경우도 많다. 샌델의 해박하고도 논리적인 강의를 듣고 읽고 있으면 어려운 문제들도 쉽게 이해되어 사람들은 고급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정의라는 점에서, 이 책의 인기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늘 한국사회와 긴밀히 연관된 공적 관심들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도 이미 다원화,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공정한 배분과 공정한 경쟁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실한 조건이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노선의 차이와 갈등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
  샌델처럼 생각한다면, 산업화나 민주화나 우리가 함께 고려해야 할 우리의 이야기이다. 워낙 온정주의가 강해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한국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그 공동체 의식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그런데 지금 정의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공동체 의식에 대해 거꾸로 질문을 던진다. 지나치게 우리끼리의 이야기에 매몰되어 타자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부자는 빈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여야는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남과 북은 서로를 부정한다. 서로가 믿는 가치와 신념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내 가족, 내 회사가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타인을 외면할 수 있다.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 권리와 자유의 이름으로 자기끼리의 이야기 만들기에만 열을 올린다.
  이기적 공동체 의식을 이타적이고 상생적인 공동체 의식으로 전환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 샌델의 주장이 매우 반가웠을 것이다. 21세기의 이 살벌한 경쟁의 시대에 도덕적 정치와 공동체적 선을 말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한국사회에도 그러한 주장을 줄기차게 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공적 영역의 정의가 정당한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교회나 그리스도인 스스로 개인의 종교적 입장이나 견해를 공적 영역에서 밝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자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일방적이고 공격적이며 강제적으로 표현하여 오히려 반감을 사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신앙의 가르침과 주장을 개인적 고백에만 가두어 두는 것은 기독교의 공적이고도 사회적인 책임을 유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더 급진적이다. 단지 공동체적 이야기 속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책임과 배려를 감당하는 것이 성경적인 정의이다. 그 사회의 공동체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공동선이 아니라 타자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의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인 정의인 것이다.
  탁월한 변증가이자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는『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Suprised by Hope)에서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인정하고 세상의 부정의에 맞서며 동시에 마지막 종말을 고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시 오심을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정의를 말하기 전 먼저 진정한 부활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학자와 단체들이 급속도로 '정의'를 주제어로 삼고 있다. 특히 오늘의 세계의 모순과 불평등, 부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자선과 나눔을 정의라는 시각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일시적이고 시혜적인 '던져주기'로는 오늘의 부정의한 모순이 해결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정의로운 세상의 지속가능한 조건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과 신앙은 공적 영역에도 충분히 영향을 끼쳐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하고 전쟁하는 현장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감당하되,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약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신앙을 가진 이들은 세상의 어두움과 부정의에 대항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한다. 이 신앙으로 정의를 세우는 빛과 소금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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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문화칼럼"/성석환 l 2011/06/24 13:53

 



파격적 업그레이드를 원하시는 하나님!

임 성빈 (장신대 교수, 연구위원)



이랜드, 샘물교회, 한민족복지재단...

이랜드는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양심적으로, 준법적으로, 성실하게 일하려 애쓰는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샘물교회도 훌륭한 목회자와 교인들이 복음 안에서 신앙과 삶을 조화시키려 애쓰는 참으로 모범적인 교회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시민사회 안에서 책임적인 교회가 되려고 여러 모로 힘쓰는 교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민족복지재단 역시 수많은 NGO 중에서도 한민족으로서 감당하여야 할 다양한 책무, 예컨대 북한 동포들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한인들뿐만 아니라 고난 받는 다양한 민족들을 위한 섬김의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는 단체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성실하고, 나름대로의 전문성도 갖추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을 갖고 있는 단체들에게 혹독한 어려움이 주어진 것일까요?

일찍이 하박국 선지자를 비롯한 이들이 “왜 의인은 고난을 받는데 저 악한 이들은 오히려 번성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곤 하였음이 기억납니다. 사실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하나님! 왜? 어떻게, 그래도 잘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도 부족하고, 노력도 부족하고, 더욱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과 단체들보다 더한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묵상하고, 조금 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다 잡아 보면 이러한 비교급의 질문은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질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그래도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 보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물론 고난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기에 섣불리 그 이유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고난의 이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고난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고난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뜻을 조심스럽게 살핌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이전보다는 더욱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물론 각각의 사건을 분석해보면 한 개인이나 집단의 교만, 판단착오 등의 실수나 과오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토록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는 분들께는 저만한 기업, 교회, NGO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여 그들의 치열한 삶과 노력에 대해서도 이해의 눈길을 돌리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게 듭니다.

저는 오늘 믿는 이들이 겪는 고난에는 ‘대속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오는 고통을 모두 ‘대속적 고난’이라고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에 동감한다면 고난당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주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하여 깊은 반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뭇 다르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도 저들이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저러한 일을 당하는 것인가를 따지고 있다면 그 때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고난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들보다 훌륭한 저들에게 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고난이 허락된 것인가?” 저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욱 훌륭한 비전과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행하는 이들이었기에 오늘날 그러한 고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더욱 부족한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를 일깨우시기 때문입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너희가 진정으로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 지엄한 경고의 음성을 우리는 겸허히, 그러나 갈급한 마음으로 듣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의 업그레이드를 시급히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과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난 후 지난 50 여 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정치적, 경제적, 신앙적 축복을 물 붓듯이 부어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에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응답하여 왔습니까?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늪에 침잠되어 가는 오늘의 한국 신앙인들과 교회와 사회와 이 민족을 일깨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비상수단을 동원하셨습니다. 우리보다 훌륭한 이들을 세상의 비난과 조롱에 내어 놓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웬만한 성실과 웬만한 전문성과 웬만한 영성을 가지고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정직함과 지혜와 믿음과 함께 작은 이들을 품어 안는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됨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이 수직적이고 개인적인 영성에 집중하여 왔다면 이제는 수평적이며 이웃을 품는 공동체적 영성을 더욱 보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사랑에 힘써 왔다면 이웃 사랑도 그와 같은 것임을 더욱 기억하고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는 기독시민으로서의 이중적 정체성도 더욱 분명히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에 속한 나라의 시민이기도 한 사실을 기억하고,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수행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결국 신앙과 삶을 하나로 묶는 통전적 영성, 통전적 믿음에로 강력히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 몸으로 ‘아멘’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간절히 앙망하오니 주여! 우리의 애통함과 회개가 아프간에서 고난 중에 있는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의 귀환과 이 땅에 진정한 기독경영의 자리 잡음과, 교회다운 교회, 신앙인다운 신앙인으로 열매 맺게 하소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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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문화칼럼"/성석환 l 2011/05/0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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