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희망의 이유를 물을 때....

<멜랑콜리아>(라스 폰 트리에, 미스터리, 판타지, 15세, 2011)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는 유럽영화상에서 유러피언작품상을 수상하고, 칸 영화제에서는 커스트 던스틴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단히 무겁다. 나치 발언으로 칸 영화제에서 추방된 감독 자신은 물론이고 내용에 있어서 많은 화제를 낳은 작품이라 호기심으로 가득했지만, 영화가 전해주는 비극적인 정서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두통을 앓아야만 했을 정도다. 그만큼 우울하고 불안한 정서를 잘 표현해냈다고 보면 되겠다. 영화매니아가 아니라면 감상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나, 그럼에도 대중적인 글쓰기가 요구되는 이곳에 소개하는 이유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니 오늘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해야 할 과제를 제시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대사회의 우울한 정서와 종말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전제하지만 지구 종말을 다룬 여느 영화보다 더욱 실감나게 연출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의 리얼한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영화는 총2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저스틴(커스트 던스틴 분)”이며, 2부는 그녀의 언니인 “클레어(샬롯 갱스부르 분)”이다.

저스틴은 유능한 광고 카피라이터다. 성과를 중시하는 직종으로 정상에 올랐다가도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는 일이 다반사인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인정받았던 그녀가 일을 포기할 결심으로 결혼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은 가장 즐거워할 결혼식에서 보이는 그녀의 이상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데, 가족 모두가 짐작하고 있을 정도로 그녀는 이미 오랜 동안 우울증을 앓았던 듯이 보인다. 이것이 과잉성과를 요구하는 직업과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엄마에게서 느껴볼 수 있는 가족력에서 비롯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 우울증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우울한 정서는 결혼식 피로연에서 그대로 표출되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결국 하객은 물론이고 신랑과 그의 가족 모두가 떠날 정도가 된다. 그 후에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고, 언니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살게 된다.

대부호의 남편을 둔 클레어는 저스틴을 돌보는 책임감 있는 생활에서도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낸다. 충돌로부터 오는 비극을 맞이하기 전에 자살할 수 있도록 약을 준비해놓을 정도다. 남편의 위로로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하지만, 불안과 공포의 정서는 숨길 수가 없다. 놀라운 일은 이런 정황에서도 저스틴이 보이는 평정한 상태다. 우울증 환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평정한 태도를 취한다고 하는데, 저스틴이 그랬다. 클레어의 불안해하는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스틴은 평온하다. 오히려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 가까이에서 밝게 떠오른 밤에 숲속의 냇가로 가서 나신의 상태로 스스로를 노출시킬 정도로 의연함을 보인다. 장면은 비록 에로틱하지만, 의미적으로는 다가올 모든 운명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과학자들의 예측은 빗나가고 지구가 행성 멜랑콜리아와 충돌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종말에 임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미국식의 재앙영화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다. 지구 종말에 임할 때 소요가 없진 않겠지만, 그래서 할리우드식 표현이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나, 개인이 겪는 불안과 공포의 정서와 관련해서는 <멜랑콜리아>가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일 것 같다. 하나는 우울함이다. 감독 스스로가 앓았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한 정서가 지구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종말상황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공포로서 종말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이다. 종말 이후의 세계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다면, 클레어 남편의 경우와 같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선택이나 클레어가 보여주었던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 경제와 정치가 우울한 정서로 가득하고 또 지구 종말론이 만연한 현실에 직면해서 기독교인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세상은 지금 희망의 이유를 묻고 또 찾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적인 종말론에 근거해서 희망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과잉경쟁에서 도태될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가운데 세상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 또한 종말적으로 보이는 상황에 직면해서 절망하는 인간을 돌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마저 과잉경쟁에 빠지고 또 세상의 요동에 동요한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멜랑콜리아>  (0) 2012/05/19
<그녀가 떠날 때>  (0) 2012/04/15
레이디 가가의 음악  (0) 2012/04/13
레이디가가의 내한공연에 즈음해서  (0) 2012/04/08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5/19 06:07


<사령카페>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신촌 살인 사건으로 인해 사령카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사령카페는 죽은 사람의 넋인 사령(死靈)을 소환하는 방법을 공유하고 자신의 사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이다. 주로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회원들은 ‘특정한 의식을 통해 사령을 소환해 자신의 곁에 두면 악령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믿음가지고 있다. 국내 최대 사령카페의 회원 수는 3000여명에 이른다. 국내 한 포털사이트에서 '사령카페'를 검색하면 관련 카페들이 50여개 정도 나온다. 대부분 회원으로 가입해야만 볼 수 있는 비공개 카페다.

사령 카페 회원들이나 블로거들은 사령이 악령에 맞서 자신을 지킨다고 생각한다. 친구 같은 보통형, 사귈 수도 있는 애인형, 지우개 가루를 먹는다는 학업형 등 사령 종류도 다양하다. 이 카페에 가입한 회원들은 자기가 소환했다고 믿는 ‘사령’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 또는 가족이라며 자신의 ‘사령’을 다른 회원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이는 최근 서구권이나 일본 등지에서 유행하는 오컬트문화와의 관련이 깊다. 오컬티즘(occultism)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이론. 그러나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면서 신비주의와 주술 등이 혼합돼 사이비 종교처럼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호기심이 강한 청소년은 일본 만화나 인터넷을 통해 오컬트 문화에 빠져들기 쉽다는 게 정설이다. 현대인의 공허한 정신세계를 파고드는 오컬트문화는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무시할 수 없는 매니아 세력을 양산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은 일본 만화 등을 통한 오컬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번 신촌살인사건에서 살해된 김씨의 전 여자친구인 박씨도 오컬트 문화에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만화 캐릭터 의상을 그대로 따라 입고 노는 '코스프레' 동아리에서 이군과 홍양을 만나 친해졌다. 이들은 초능력을 가진 사냥꾼들을 다룬 '헌터X헌터' 등의 일본 만화를 즐겨 봤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초자연적인 영혼을 믿는 사령카페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초중고등학생들이 사령카페에 초중고 학생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사령카페는 일종의 놀이터이다. 그들에게 사령은 “악령을 쫓는 수호신이자 애완동물처럼 키울 수 있는 존재”였다. “꼬마 사령이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모습이 보이면 사진을 같이 찍고 노래방도 가고 싶다”, “내 손 잡아 주신 거 안다.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어느 회원은 “시험 시간에 가슴이 아팠다. 내 사령들이 놀아달라고 나를 때린 거였다. 내 새끼들 미안해, 미안해”라는 글들이 올라온다.

“그 무렵, 가족들끼리 맨날 싸웠어요. 외로웠어요. 탈출구가 필요했죠. 사령카페 활동이 너무 재미있었어요.”라는 고백을 하는 회원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이 사령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을 맹신하는 이유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이런 맹신이 죽음을 경시하는 현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황금중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도피처다.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아이들이 절제 없이 현실과 다른 가상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사고가 비현실적으로 극단화되면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사령카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번에 숨진 김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신앙으로는 전 여자친구인 박씨가 사령카페에 빠져드는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도 "여자 친구가 사령카페 소굴에 빠져 있다, 구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박씨가 사령카페에 빠진 것이 이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쓰레기", "언령(사령의 일종)도 다룬다고 허풍을 친다"고 비난했다. 사령카페는 기독교적관점에서 볼 때 큰 문제들이 있다. 사령카페는 사이비종교의 형태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특별히 청소년들의 영적세계를 혼란시키는 사령카페의 활동에 대해 교회는 반드시 해결책과 보완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왜 사령카페에 빠져드는지 문제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에 대체해야한다.

현실세계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아이들이 인터넷 가상의 세계에서 비현실적인 놀이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보완책을 제시해야할 것이다.

이웅혁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피의자들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잠시 사령카페라는 비공식 문화를 통해 심리적 허탈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었다"며 "사령주의에 대한 이들의 사고 방식과 정서를 놓고 다투면서 생긴 복수심이 김씨 살해 과정에서 큰 작용을 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오컬트문화는 현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점에서 나날이 인기를 높여가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모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오컬트문화가 번성하는 것은 사회가 정신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징표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공허한 정신세계를 파고드는 이런 문화에 대해 교회는 진정한 영적 가치를 제시하고 훈련하는 대안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보드라야르가 지적한데로 오늘날의 세계는 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상이 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 이런 가상의 세계가 득세하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에게 가상의 세계는 현실을 회피하는 일종의 해방구로서 더욱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가상성이 미치는 영향력에 주목하면서,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 및 인터넷 중독에 대한 이해와 치료에서부터, 전반적인 학교교육의 쇄신과 문화 일반의 변혁에 이르기까지 교회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복음 증거라는 본연의 사명과 함께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사회적․문화적 책임을 감당하는 한국교회의 적극적 자세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필자"문화칼럼"/임성빈 l 2012/05/16 11:36

여성으로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닥 감독, 드라마, 15세, 2010)


매스컴을 통해 종종 접하는 소식이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가족의 명예를 매우 중시한다. 대체로 종교적인 가르침이 문화로 형성되고 삶으로 구현될 때는 강한 구속력을 갖게 되는데, 가족의 명예는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는 이슬람 종교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문화이며 또한 삶의 한 방식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강한 구속력을 갖는 전통에 해당한다. 여성의 행실 때문에 가족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심지어는 남자 형제나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다 해도 그 사회에서는, 비록 논란의 여지는 많을지라도, 범죄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것은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이기 때문에 전 세계 여론을 들끓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떠날 때>는 특정한 사례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해도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를 다룬다. 터키계 독일 태생인 우마이는 터키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다. 독일의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우마이가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강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남편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것은 초반부의 몇 개의 장면들을 통해 제시되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된 생활에서 결혼 생활의 의미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던 우마이는 아들 챔과 함께 친정이 있는 독일로 돌아간다. 여자가 이혼을 하거나 또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던 이슬람 전통은 우마이의 결정과 가족 사이에 심각한 갈등 관계를 유발한다. 우마이로 인해 가족이 독일 내 터키 사회에서 가쉽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가족 모두가 참기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어느 날 참다못한 아버지가 챔을 생부에게 강제로 돌려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우마이는 경찰의 도움에 의지해서 여성보호센터로 몸을 피신한다. 그녀에게는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챔과 함께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박한 꿈과 희망을 이해할 수 없었던 친정 식구들은 우마이의 완고하면서도 돌발적인 행위 때문에 마침내 그녀를 집안의 수치로 여긴다. 더군다나 동생의 결혼이 언니의 이혼문제로 무산될 위기에 처해지자 우마이에 대한 가족의 태도는 급변한다.

그러나 우마이가 가족, 곧 혈연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달랐다. 여성보호센터의 책임자가 가족의 누구와도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마이는 엄마와 여동생 남동생 등을 만나면서 혈연관계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표현해 보일 정도로 혈연관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영화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결국 가족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의 결혼식에 가족의 일원으로서 참석하려는 우마이의 의지는 가족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녀는 왜 혈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녀가 가족에게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도 가능할 수 있었고, 마지막 장면의 불행한 결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녀는 혈연을 떠나지 못한 것일까? 자신의 혈연은 떠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왜 챔과 생부와의 관계는 끊어놓으려 했던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단서는 있다. 영화의 독일언 원제인 Die Fremde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방인, 낯선 자, 타자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은 '그녀가 떠날 때'로 의역해서, 그녀가 여성으로서 종교적으로 각인된 전통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운명을 다루는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제가 주는 의미를 다소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가족과 전통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들 챔이 결코 이방인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우마이는 터키계 독일인이기 때문에 만일 터키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면 이중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독일에서 나서 자라고 독일 사회와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란 여성이기 때문에 자아 정체성도 그렇지만, 문화나 외모를 보아도 그렇다. 독일 사회가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폐쇄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독일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가 떠날 때’라고 할 경우에는 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방인”은 우마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두 개의 국면을 나타낸다. 하나는 가족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방인이요, 터키계 독일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태생적으로 독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은연중에 겪어야 하는 이방인으로서 정체성이다. 우마이가 가족을 떠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나 따뜻한 독일 친구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결코 안착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두 개의 상황이 만들어낸 갈등 때문이다.

이 영화는 종교적으로 각인된 문화가 가족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그러한 전통이 특별히 여성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이방인, 곧 타자들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정체성과 삶이 강조되기 보다는 엄마로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부각된 것 같아 다소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전체가 주는 강한 인상과 메시지를 결코 반감하진 못한다.

이미 서울기독교영화제에서 상영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이 독립적인 삶을 살려고 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갈등의 국면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엿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개인과 개인의 갈등이었다면, <그녀가 떠날 때>는 가족과 개인, 개인과 전통, 개인과 사회의 갈등 등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종교는 결코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적인 전통과 문화가 사회의 양심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배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낯선 자로서 타자로서 버려진 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일이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도록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전통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복음은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관용과 용서와 인내를 통해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멜랑콜리아>  (0) 2012/05/19
<그녀가 떠날 때>  (0) 2012/04/15
레이디 가가의 음악  (0) 2012/04/13
레이디가가의 내한공연에 즈음해서  (0) 2012/04/08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4/15 18:12

레이디 가가의 음악

레이디 가가는 스스로를 음악 뿐 아니라 패션에 있어서도 예술가라고 얘기한다. ‘패션 파괴자’라는 그녀의 별명은 그녀와 꼭 들어맞는다.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언제나 패션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는 그녀는 심지어 음악 보다 패션에 있어서 더 이름이 나있다. 락커스(Rockers) 스타일에서부터 펑키(Punky), 고스(Goth), 글램(Glam), 도미나트릭스(Dominatrix), 안드로지너스(Androgynous), 차브(Chav)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패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반면에 패션에 비교하자면 음악은 오히려 진부하다고 할 만큼 보편적이다. 일각에서는 그녀의 음악을 마돈나와 엘튼 존, 마이클 잭슨, 그리고 퀸과 같은 팝 가수들의 음악적 질료들을 혼합 가공해 탄생한 파생상품이라고 까지 말한다. 실제로 그녀의 음악을(특히 <Born this way>) 듣다보면 마돈나를 생각나게 하는 창법과 퀸의 ‘We will rock you’의 샘플링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곳곳에서 발견되는 매력적인 훅들은 최근 일렉트로닉 팝을 넘어서 RnB계열의 음악에서도 즐겨 차용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대중적인 팝 음악에 관심이 있고 이를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레이디 가가의 음악을 아무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녀의 진부한 음악은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음악과 패션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획득되는 음악적인 지지는 결국 음악성의 빈곤함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인 듯하다. 사실 이러한 염려는 그녀가 패션에서 보여주는 만큼의 실험성을 음악에서도 보여줬으면 하는 기대를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인데, 하지만 필자가 생각했을 때 그녀가 보여주는 보편적인 음악과 기괴한 패션의 조화는 포스트모던 사회이며 또한 영상문화시대에서 자신을 주장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다. 충격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비주얼한 화려함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상문화시대에서 매우 활성화되고 있는 뮤직 비디오는 비주얼한 측면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 사실 마돈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만큼 실험적인 요소들을 대중성과 잘 접목시킨 사례도 굉장히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음악이 단지 실험적인 패션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방을 바탕으로 한 재창조, 파생상품이라고 하지만 이를 단순히 비판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넓게 봤을 때 모든 현대 예술은 모방을 통한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레이디 가가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모방을 통해 가십 거리를 유발하면서까지 자신을 대중매체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킬 줄 아는 가수다.

레이디 가가의 음악이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성을 획득한 팝 음악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반 기독교적인 시각에 일침을 가한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반기독교라는 낙인을 찍을 때 흔히 마릴린 맨슨이나 데스메탈(death metal) 쪽의 밴드들이 언급된다. 이 때 그녀의 음악 또한 이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는데, 이는 분명 온당하지 못한 평가다. 정규 2집에 이르러 레이디 가가의 음악들이 대체로 어두운 색이 짙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맨슨의 음악이나 데스메탈과는 엄격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맨슨과 같이 직접적으로 기독교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음악가들은 일단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어둡다. 지나칠 정도로 왜곡된 기타 사운드와 공격적인 드러밍, 그리고 대체로 마이너한 코드 진행 때문이다. 이는 직관적으로 어두운 색을 토해내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레이디 가가의 경우, 이전에 있었던 경쾌한 리듬이 희미해지고 전반적으로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누가 들어도 흔히 말해지는 ‘사탄주의자’들의 음악과는 다른 길 위에 있다. 음악을 구성하는 사운드의 조합, 창법, 그리고 코드 진행. 어디를 뜯어봐도 그들과의 차이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녀의 음악에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발견되는 경쾌하고 희망적인 사운드가 더 두드러진다.

그녀의 음악을 접함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가 말한 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의 해체이다. 대중문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성(분절화, 파편화), 대중성(대중지향), 혼합성의 특징을 갖고 구현되고 있다. 그녀의 음악은 특별한 맥락을 갖지 않는 중독성을 갖는 후렴구가 많고, 여러 음악들이 혼합되어 있고, 또한 다의적인 기표들이 많이 나타난다. 물론 패션에서도 여러 패션들을 혼합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이것은 의미를 생산하기보단 단순한 충격 효과를 노리는 경향으로서 포스트모던한 대중문화 예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녀의 음악이 어느 한 쪽 의미만으로 해석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녀의 음악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조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세계관에 대해 그녀가 보여주는 비판적인 태도, 예컨대 반권위적이고 반윤리적이고 성적 경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거대담론 곧 권위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장되는 가치체계에 대한 비판에 해당된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멜랑콜리아>  (0) 2012/05/19
<그녀가 떠날 때>  (0) 2012/04/15
레이디 가가의 음악  (0) 2012/04/13
레이디가가의 내한공연에 즈음해서  (0) 2012/04/08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4/13 05:38

 

 

2012년 4월 현재, 세계적인 팝 스타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내한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녀의 내한 공연이 12세 관람가였던 2009년 내한공연과 달리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유명인들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나오고 있지만, 주최측인 현대카드사에서도 수용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판정이 번복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등급 판정의 부당함에 대한 주장은 대부분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내세우는 근거의 빈약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등위는 음주를 조장하는 노랫말과 선정적인 안무, 영상을 근거로 내린 판정이라고 하지만, 일각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의제기가 계속되고 있다. 공연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공연과 뮤직 비디오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노랫말 역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행위 관련 퍼포먼스로 말하자면, 요 근래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안무 또한 이와 동일한 판정을 받았어야 마땅하다. 대중문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표현에 대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는 말이다.

이러다보니 이번 레이디 가가의 내한 공연의 등급판정에는 또 다른 근거가 하나 더 있다고 추측되면서 반 기독교적인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국내 기독교 단체들의 공연 반대 움직임이다. 기독교 단체들은 그녀의 내한공연이 확정되고 난 얼마 후부터 그녀의 음악이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비방하고 동성애를 권장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내한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한 기독교 단체의 성명서에 따르면, 공연 주관사를 불매운동으로 위협하며 기독교인들에게 문자로 독려하고 있다. 물론 불매운동이라는 압력이 등급 판정이 급하게 변경된 직접적인 원인임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판정이 번복된 시점이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 표명 직후라는 점을 보아 상호연관성을 의심하는 가운데 반 기독교적인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시점에서 레이디 가가의 음악에 대한 분석은 매우 절실하며, 다양한 장르에서 대중문화와의 소통을 추구해왔던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서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녀의 노랫말과 뮤직비디오는 연관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랫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영상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충격적인 감동만으로 의미를 경험시키려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 의미를 생산하지 않으면서 의미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퍼포먼스와 사운드 그리고 화려한 비주얼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녀가 패션에서 돋보이는 무대를 꾸미는 것도 사실은 청중들의 충격적인 경험을 겨냥한 것이며, 살코기 의상이나 기이하고 특이한 의상으로 이미 음악계는 물론이고 패션계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에게 패션과 안무는 노래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노랫말에 대한 분석과 뮤직 비디오에 대한 분석 그리고 패션과 공연에 대한 분석은 각각 분리되어야 한다. 영상이나 노랫말만을 가지고 그녀의 음악이나 공연을 판단하는 것은 예술 특히 공연예술의 미학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좀더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가 떠날 때>  (0) 2012/04/15
레이디 가가의 음악  (0) 2012/04/13
레이디가가의 내한공연에 즈음해서  (0) 2012/04/08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달팽이의 별>  (0) 2012/03/09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4/08 16:34

오늘 우리가 살아갈 이유

<버킷리스트>(롭 라이너, 드라마, 2007, 12세)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 회자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중국 상하이 푸단 대학교 공공정책과 교수로서 안타깝게도 30대의 나이에 요절한 고 위지안 박사이다.

이병철 회장이 회자하는 이유는, 그가 죽기 전에 제기했다는 질문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그 질문들이 세간에 이미 잘 알려진 차동엽 신부에 의해 “잊혀진 질문”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소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질문들 가운데 눈길이 가는 것은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방법이 있을까요?”이다. 이 질문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발견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라는 세 가지 질문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류는 오랫동안 고심해왔고, 수많은 현인들과 학자 그리고 종교가 대답을 시도했지만, 하나의 견해일 뿐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으로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차동엽 신부는 고 이병철 회장의 위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것”에서 대답을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을 때, 사명이 분명해지고, 그때 비로소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유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거나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한편, 낯선 이름의 위지안은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중국의 여성학자로서 암으로 요절한 그녀는 생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일상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동안 현실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학문과 일에 사로잡혀 살다가 말기암 판정을 받고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상을, 가족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가족, 일상,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오늘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밝혔다. 사실 그녀는 학문을 통해 그 이유들을 구성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가 발견한 것은 이미 자기 주위에 주어져 있는 많은 것들이었다. 그녀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왜 생의 끝자락에 가서야 비로소 가족과 일상의 가치를 보게 된 것일까?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위지안 박사의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질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왜 이런 질문들이 살아있을 때 진지하게 고민되지 않고 꼭 죽기 직전에 제기되는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 <버킷리스트>역시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고민한 결과를 담고 있다. 앞의 두 사람의 질문과 유사하지만, 대답은 조금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죽음을 몇 달 앞둔 두 사람의 이야기다. 두 사람 모두 살만큼 산 것 같이 보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아직 여생에 대한 욕심을 가질 만도 하다. 둘은 같은 병실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데, 두 사람 모두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버킷리스트’을 작성한다. 버킷리스트라 함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한 목록을 말한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달리 말한다면,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말한다. 버킷리스트에 따라 이집트 여행길에 오른 두 사람은 장엄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감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집트 신화 가운데 한 부분을 묵상한다. 죽은 후에 영혼이 하늘에 가면 신이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따온 것 같은 두 개의 질문, 곧 “인생의 기쁨을 찾았느냐?”와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는가?”이다. 이 질문은 사실 그들의 ‘버킷리스트’를 압축한 것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국 인생의 기쁨을 찾는 것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에 따라 본다면, 나의 삶의 이유가 기쁨에 있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삶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기적인 기쁨을 배제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을 포기하고 타인의 기쁨만을 위해 올인하는 불균등한 삶도 배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이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버킷리스트>는 우리에게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죽기 전이 아니라 생명력이 충일할 때 발견할 방법은 없을까?

시편 8편의 기자는 하나님에 의해 생각되고 또 그의 돌보심을 받는 것에서 구원의 기쁨을 느꼈고, 또한 그러한 기쁨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을 돌보는 자로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고백하며 감격해 한다. 그의 고백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오늘 살아야 할 이유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생각되고 있고 그의 돌보심을 받기 때문이며, 또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에 대한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디 가가의 음악  (0) 2012/04/13
레이디가가의 내한공연에 즈음해서  (0) 2012/04/08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달팽이의 별>  (0) 2012/03/09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0) 2012/03/05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3/22 05:58

힘과 인간 본질의 상관관계

<크로니클>(조쉬 트랭크, SF, 드라마, 액션, 2012, 15세)

힘이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에너지이다. 힘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힘을 더하기 위해 애쓰는 행위를 노력이라고 한다. 노력에 따라서 힘은 더해지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힘을 잃게 된다. 힘의 이동은 사회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노력한다고 해서 당연히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노력은 힘을 더하는 방식 가운데 최선의 것이다. 그렇지 않고도 얻어지는 힘은 특혜 혹은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판단을 받는다. 정의란 바로 힘의 균등한 배분에 대한 사회적인 통제력을 일컫는다.

본질적으로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되고 또 이해되기 때문에 힘은 처음부터 관계적이다. 절대적인 힘이란 어떤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결코 우위를 잃지 않는 힘을 말한다. 그러나 힘이란 본질적으로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 균형은 정상적인 상호작용에 기여하고, 정상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힘의 균형은 유지된다. 균형이 깨지면 상호작용은 약화되고 일방적인 것이 된다. 상호작용이 안 되면 균형을 잃게 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호작용에서 우위가 결정되기 때문에 힘은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다. 힘이 있으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힘에는 자기력, 중력, 만유인력 등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생명력, 인지능력, 지각능력, 사고력, 상상력, 판단력, 정력 등이 있으며 이런 힘을 바탕으로 인간은 상호작용을 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잠재적으로 힘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다. 이밖에도 지력이나 창의력 그리고 예술적인 능력과 같이 노력을 통해 갖춰지는 것이 있다. 자연의 힘과 달리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만 주어진 것 외에 대부분의 힘은 인위적인 노력을 덧붙여서 획득하는 것이다. 권력과 재력 그리고 군사력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규약에 의해 형성되는 힘을 갖는다. 정치및 사회권력이 대표적이다.

어떤 힘이든 균형이 깨지면 혼란이 오기 때문에, 힘은 결코 무한할 수 없고 일정한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톨킨의 동명소설의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반지의 제왕1-3>(피터 잭슨, 2001-2002)은 통해 바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정상적인 범위 혹은 자연법칙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가리켜 사람들은 초능력이라고 일컫는다. 초능력의 실재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자고이래 동서고금으로 초능력에 대한 동경은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특히 각종 판타지 문학에서 초능력은 가장 선호되는 소재이다. 종교 역시 자연법칙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례들을 기적설화라는 형태로 전승해왔다. 기적은 자연법칙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의 작용임에 비해 초능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즈음해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힘이 없다면,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회에서 일대 혼란은 피할 수 없으며,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힘은 존재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힘은 존재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목적을 실행한다.

따라서 힘은 언제나 일정 범위 안에서 그리고 일정한 원칙에 따라 발휘되도록 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이 되고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된다. 예컨대 권력이 세상을 휘두르기 위해 사용될 때,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지력이 균형을 잃고 더 이상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때,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정력이 과욕으로 이어질 때, 삶의 기운인 생명력이 자신만 살겠다고 힘을 발휘할 때, 바로 이러한 때에 폭력은 탄생한다. 폭력이란 자신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 교회의 권력과 근대의 전체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 그리고 독일 민족사회주의가 휘둘렀던 힘을 생각해보라. 폭력이 인류 사회에 어떠한 불행을 가져왔는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동안 이런 힘의 역학과 논리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성찰하고 재현해왔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등. 처음에는 사회에 기여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출되었지만, 편수가 늘어갈 수록 다양한 형태와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예컨대 스파이더맨은 처음과는 달리 점점 더 인간으로서 영웅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고, 엑스맨은 사회의 영웅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하는 영웅담을 다룬다.

조쉬 프랭크 감독의 데뷔작 <크로니클>은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힘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매우 색다른 연출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크로니클>은 판타지의 성격이 강하지만, 특별한 방식의 촬영으로 마치 실제 동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파운드 풋티지 기법(실제 사건의 동영상인 것과 같은 착각을 주는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페이크 다큐라 불림)은 그동안 <REC>, <파라노말 액티버티>, <블레어윗치>, <포스카인드>, <클로버필드> 등의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크로니클>은 이들보다 더욱 강력하고 또 색다르게 리얼리티와 판타지 모두를 살려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는 우연한 기회에 초능력을 얻게 된 10대 소년들의 좌충우돌의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캐릭터 분석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주목되는 캐릭터는 앤드류 다트머이다. 소방관으로 재직하다 사고로 은퇴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이고 폭력을 휘두르며, 엄마는 오래전부터 병을 앓고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 앤드류 자신은 또래 아이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오직 사촌인 맷과만 다니며, 또한 오직 카메라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특이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앤드류는 엄마로부터 ‘나는 강하다’는 말을 되 뇌이도록 부탁받을 정도로 매우 심약한 성품을 갖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돈이 없어서 엄마의 병원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약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앤드류에게 다른 두 소년보다 더욱 강력한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초능력을 가진 소년들의 장난스런 일상과 성장담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 바로 앤드류와 같은 캐릭터가 초능력을 갖게 될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등감을 갖고 심약하며, 척박한 환경에서 살면서 사회적인 냉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앤드류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경우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인가를 묻고 대답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범죄가 환경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는 지나치게 식상한 논리를 전개하는 듯이 보이지만, 앤드류의 경우엔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초능력을 사용해 장기자랑에서 재능을 맘껏 발휘하여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기대와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오히려 친구들의 놀림감이 된다.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초능력은 친구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며, 엄마의 약값 문제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자, 앤드류는 갑작스럽게 통제력을 상실하고 극도의 흥분상태로 빠진다. 앤드류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분노를 해결함에 있어서 초능력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함께 초능력을 획득한 맷이 초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을 제안하지만, 앤드류는 무시한다. 엄마의 약값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함에 있어서 자신의 초능력을 무절제하게 사용한다. 앤드류가 일으킨 일련의 해프닝 때문에 발전될 심각한 국면을 염려하여 그를 저지하는 친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다. 결국 사촌인 맷에 의해 죽음을 맞게됨으로써 앤드류에 의해 초래된 혼란은 평정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기존의 것과 아주 다르게 연출한 것으로 돋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힘 자체보다는 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나 강력한 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인간은 과연 힘과 관련해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인간은 힘을 즐기기도 하고 추구하기도 하며, 그것으로 개인 혹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한다는 사실이 영화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층 더 나아가서 힘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질 때, 예컨대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혹은 힘을 통제하는 수단이 사라지게 될 때는 사회적으로 대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힘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힘이란 통제가 가능할 때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사회의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한편, 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매우 상반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전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신 것을 말하며, 인간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세상에 대한 사랑,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요3:16)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디가가의 내한공연에 즈음해서  (0) 2012/04/08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달팽이의 별>  (0) 2012/03/09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0) 2012/03/05
디센던트  (0) 2012/02/25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3/20 14:52

너와 나는 오늘 우리가 살아 갈 이유이다

<달팽이의 별>(이승준, 다큐멘터리, 15세, 2012)

<달팽이의 별>은 장르상 장애인 영화이다. 2011년 전주영화제에서 처음 선 보인 후,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서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장편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POV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다큐멘터리’ 중 12위를 차지했다. 화려한 이력이 말해주고 있지만, 이 영화는 전달되는 이야기와 내용을 담아내어 표현하는 형식이 서로 잘 조화된 작품이다. 무엇보다 장애 자체가 영화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 인물들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는 보도 듣도 못하는 시청각 장애인 조영찬씨와 어려서 사고로 척추를 다친 김순호씨 부부의 일상과 꿈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의 중심은 물론 영찬에게 맞춰져 있다. 영찬은 태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은 할 수 있지만, 현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이런 이중 장애를 안고 달팽이처럼 오직 촉각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며 느릿느릿하게 사는 영찬의 세계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우주다. 아무 소리도 빛도 없는 세계에서 그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로 산다. 그래서 자칭 “우주인”이다. 단순히 시청각 장애 때문은 아니다. 우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청각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었던 외로움의 세계를 말하기도 한다. 빛과 소리에서 멀어지고, 장애인을 보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으로부터도 멀어진 것이다. 바로 이런 고립된 세계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그는 천사 같은 여인을 만나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척추장애를 갖고 있어서 작은 몸집을 갖고 있다. 영찬은 점자 자판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아내는 손등을 두드리며 남편과 소통한다. 소리와 모양과 위치와 공간을 자판 두드리듯이, 손등을 두드리며 전달해준다. 점자로 세계를 읽고 촉각만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일은 보통의 상상력이 아니면 도무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찬은 그런 소통 방식으로 얻은 세계 경험을 시와 수필로 그려낸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달팽이의 별>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이다. 비장애인에게도 험난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징애인으로 살아가는,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삶을 전해주는데, 영화에는 시청각 장애인의 삶과 경험 그리고 느낌을 전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묻어있다. 3중장애를 극복했던 기적의 인물 헬렌켈러에게도 그랬지만, 영찬이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손으로 느끼고, 또 손끝으로 베란다 철봉에 매달린 물방울을 경험할 때나,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 스크린으로 옮겨졌을 때는 숭고함마저 느꼈을 정도다.

장애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결코 어둡지 않고 따뜻하고 밝으며,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갖고 매우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일상에서 만끽하는 삶의 유희도 발견할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동정을 유발할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감독은 단지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삶의 한 유형을 제시하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촉각을 통해 세상을 살고 경험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그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감상하면서 장애인의 현실이 어떠함을 알게 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행위를 할 수 있겠지만, 영화는 결코 이것을 겨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관객은 단순히 장애인의 현실을 아는 것 그 이상의 경험과 성찰로 이끌리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등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몇 개의 장면들을 통해 그들의 특별한 일상들을 소개하는데,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형광등을 가는 장면과 장애인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는 장면, 비를 경험하는 장면, 나무를 끌어안으며 소통하는 장면, 그리고 홀로설 수 있기 위해 아내의 안내 없이 길을 나서는 장면 등이다. 이렇게 하나둘씩 나열하다보니 영화 전체가 되었다. 그만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생각을 일깨우고 또 공감하게 하는 장면들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형광등 장면이다. 세상을 보고 또 듣는 자이지만 척추장애로 웅크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순호와 텅 빈 우주에 갇혀 허공을 헤엄쳐 가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영찬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드러내는 이 장면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조이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형광등이 고장난 것을 알아낸 것은 단연코 아내이다. 시청각 장애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위해 형광등은 교체되어야 한다. 문제는 형광등을 교체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해도, 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일 수도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척추장애를 갖고 있는 아내는 키가 작아 아무리 의자를 갖다 놓고 올라서도 형광등 높이에 닿질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보도 듣도 못하는 남편에게 부탁하기에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용기를 낸다. 먼저 침대에 올라 아내의 지시대로 손을 뻗어 램프를 더듬으며 형태와 구조를 파악한다. 그리고 연결단자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몇 차례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고장난 형광등을 빼낸다. 아내는 빼낸 형광등과 동일한 것으로 새것을 사오지만 새것을 끼워 넣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우선은 연결 단자를 찾아내야 하고, 형광등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고리들에 안전하게 끼워야만 한다. 전선들이 서로 꼬이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형광등이 제 위치에 놓이도록 돌려야 한다. 마침내 힘겹게 일을 마치고 스위치를 올리니 형광등에 밝은 불이 켜진다. 카메라는 밝게 켜진 형광등을 한참이나 응시한다. 영찬 안에 있는 마음의 빛이며 또한 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비추는 빛을 그렇게 보여준 것이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이 장면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전해주고 싶은 것은 단순히 장애인의 일상을 넘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물론 장애인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스스로 장애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어떤 의미인지를 조명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케 한다. 곧, 서로가 서로를 돕는 자로서 영찬과 순호는 서로 돕는 자로서 창조된 인간의 형상을 온전하게 구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장애인들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장면이다. 식당에서는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그들만의 만찬이다. 음식이 놓여 있는 자리를 알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눈이 되고 또 귀가 되어 대화하며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 대단히 정겹고 인상적이다. 그 어느 풍성한 식탁도 전혀 부럽지 않은 자리이며 애찬의 현장이다. 식사 후 나누는 그들의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외로움이다. 영찬과 순호의 결혼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이 대화에서 영찬은 놀랍게도 자신의 결혼이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곧 도움을 받기 위함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외로움이었음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것은 외로운 인간이 또 하나의 외로운 인간을 만난 것이지, 장애인으로서 만난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애와 장애인을 보는 시각에서 영찬 스스로가 벗어나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화였다.

이런 대화를 통해 더욱 분명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영찬의 자의식이다. 그는 스스로를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우주인으로 생각한다. 그의 이런 자의식은 현실의 두터운 벽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장애를 긍정적으로 여겨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아내 순호는 바로 이런 의지가 구현되고 실천되기 위해 준비된 도움이었으며 또한 그것으로 스스로 만족한다.

중국의 여성 학자로서 짧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중국 사회를 안타깝게 만든 위지안은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제목의 책에서, 왜 사람들은 세상 끝에 가서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지를 물었다.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자신이 말기암 환자로 판정되고,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그녀는 비록 뒤늦게 깨달았다 해도 결코 후회로만 끝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남겼고, 그것은 지인들에 의해 책으로 엮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살아갈 이유라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일상, 그 자체였다. 남편이 또 가족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달팽이의 별>을 보면서 떠오른 질문은 위지안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런 질문과 함께 오래 전 영화 <마이티>(피터 첼섬, 1998)가 떠올릴 수 있었다. 학습부진아이면서 거대한 몸집을 갖고 있는 소년과 천재적인 머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선천적인 기형을 앓고 있어서 결코 집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소년의 우정이야기다. 두 소년이 서로의 결점으로는 한 개인에 불과하고 게다가 고립된 삶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장애인에 불과했겠지만, 두 사람의 협력은 영웅을 만들어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우 희망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다. 물론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도 비슷한 주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언터쳐블>(올리비에르 나카체/에릭 토레다노, 2011) 역시 현실에서 고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전해준다. 일련의 영화들에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인간은 개인으로서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무능한 자를 돕는 유능한 자가 있다면, 장애인을 돕는 비장애인이 있다면, 결함을 가진 자에게 온전한 자가 있다면, 너와 내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면,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갈 이유로서 충분한 것이다.

서로를 주장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본질을, 만남의 의미를,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되새겨 본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못나고 나쁜 사람이라도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또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킷리스트>  (0) 2012/03/22
<크로니클>  (0) 2012/03/20
<달팽이의 별>  (0) 2012/03/09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0) 2012/03/05
디센던트  (0) 2012/02/25
<워 호스>  (0) 2012/02/12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3/09 09:42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미디어의 힘

분업화된 삶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관심이 분산되고 관심의 영역마저도 파편적이라 자신과 직접 관계되지 않으면 대체로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보고 듣기는 하나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까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 미디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자처하고,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제도로 여겨질 정도로 큰 의미를 갖는다.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며 진실을 밝힌다. 인터넷 방송 “나꼼수”나 “뉴스타파”에 대한 여론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신문과 방송 기자들의 노력으로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기를 사람들은 기대한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매스미디어는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공적이어야 할 미디어가 시청률이나 구독률이라는 상업적인 가치나 개인의 이념과 이해관계와 맞물릴 때, 미디어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게 추락한다. 소위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보들은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며, 이 때문에 미디어는 변질된다. 즉, 미디어라는 거대한 힘을 통해 정보는 왜곡(축소나 확대 혹은 대체)되고 심지어 조작될 수 있다. 또한 미디어는 사회적인 이슈를 정해주는 의제설정 기능이 있어서, 진정으로 관심을 보여야 할 사안들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오히려 전혀 다른 문제에 사회적인 관심을 갖도록 해서 여론의 심판을 모면하기도 한다.

미디어의 부당한 권력 행사를 막기 위해 방송사는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네트워크>, <트루먼 쇼>, <모비딕>, <트루맛 쇼> 등과 같이 미디어의 기능과 역할을 하나의 문제로 다룬 영화들도 제작되었다. 오늘날은 전문 미디어 업체가 각종 미디어를 감시하고 고발하지 않으면, 미디어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영화의 힘

영상문화의 한 장르로서 미디어인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라 불릴 정도로 다른 어떤 장르보다 현실을 더욱 실감나게 반영한다. 긴장과 스릴, 때로는 감동이 넘치는 플롯의 내러티브와 향상된 영상기술력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적 상상력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를 구현한다. 영화의 힘은 영화적인 경험이 다른 어떤 장르와 달리 몰입의 상태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의 이미지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소위 ‘이미지 폭격’을 당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서 현실을 정의하기도 한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현실로 다시 돌아오지만, 영화적인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개그콘서트의 한 프로그램인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애정남)가 사회적으로 위임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힘을 발휘하고 있듯이, 공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화는 현실을 정의하는 힘이 있다. 영화가 말하는 것이 곧 현실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한 표현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갖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표현에 신중을 기하지 않은 영화들은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다.

영화의 사회성

영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갖고 있는 사회성 때문이다. 영화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다. 영화는 당대의 기술력이나 사회적인 배경 등 역사적인 한 계기와 관련해서 생산되며, 현대인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의 단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 사회를 복원할 수도 없지만, 영화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의 단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속 장면들은 사회와 현실을 이해하는 한 단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영상미학적으로 구성된 장면들의 상호관계 혹은 충돌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의미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각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기독교 신학도 예기치 않은 현상으로부터 적지 않은 의미를 건져낸다. 영화의 사회성이 단지 배경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공공의 성격을 가지려면 공공의 관심사를 소재나 주제로 다뤄야 한다.

영화의 신학적인 의미

영화의 신학적인 의미는 크게 문화신학적이고 공공신학적인 성격으로 구분한다. 문화신학적인 의미란 영화가 하나의 영상문화로서 의미를 생산하고 유통하기 때문에 보는 자들로 하여금 계시적인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제된다면 문화를 통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재인식할 수 있다. 때로는 일상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공공 영역(환경, 인권, 생명, 정치, 경제, 사회 문제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중의 관심을 환기해서, 보는 자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공공신학적인 의미이다. 곧,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상미학을 통해 지시된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에서 생산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며,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통해 뜻하지 않은 경험을 하고 또 책임감 있는 참여를 하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보는 시대의 속성

근 몇 년 사이에 상영된 한국 영화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과거에 비해 공권력(경찰, 검찰, 정치가, 사법기관 등)의 부패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야수>, <공공의 적 2>, <박수칠 때 떠나라>, <부당거래>, <특수본>, <범죄와의 전쟁> 등과 같이 문학적인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홀리데이>와 <도가니> 그리고 <부러진 화살>과 같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들도 있다. 영화 속 공권력의 부패, 정의의 상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물론 영화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편향된 시각 때문에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고 정치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레닌과 히틀러는 대중을 선동하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영화를 사용하였다. 영화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오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 단적인 예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공권력이 타락하는 이유들을 보면 대체로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가장 흔한 것은 가족의 생계와 연결되어 있다. 가족을 핑계로 불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승진을 위한 실적을 올리기 위함이다. 세 번째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네 번째는 권력 자체의 부패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화를 통해 공권력의 타락과 사회정의가 상실된 현실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유신정권이나 5, 6 공 시절에는 제작 자체가 쉽지 않았을 표현이 가능해진 사실에 대해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권력에 대한 그동안의 불신을 확인하는 일 같아서 맘이 편치 못하다. 영화적인 표현을 단지 수사학적인 기호로 이해해야 할 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사실로 받아들일 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회 현실의 한 단면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 사실에 근거해서 제작된 영화들조차도 공권력의 부패를 침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냐 표현이냐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초점은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영화 속 공권력의 부패와 심판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영화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이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독재와 군사정권을 경험한 까닭에 공권력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지만, 안타까운 현실은 공권력의 타락에 대한 보도가 오늘날에도 여전하며, 심지어는 더욱 많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고 또 이뤄지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그렇게 새롭지 않다.

문제는 부당한 공권력 때문에 사회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이며, 일련의 영화들이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이유는 희생되는 사람들이 바로 사회적인 약자인 대중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가난한 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어린이, 여성(이주여성) 등 그야말로 힘없는 약자들이 대부분이다.

힘과 부를 추구하는 사회와 교회

영화를 통해 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정리해서 말한다면, 강력한 힘과 막대한 부를 추구하는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일그러진 모습을 찾는다면, 아마도 교회의 변질과 타락일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 그리고 정의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그야말로 영화 속 교회 혹은 기독교는 언제나 부정적이다. 교회는 로비의 장소가 되거나, 교인이 범죄자로 등장하며, 사회적인 불의와 억압당하는 사회적인 약자와 타자에 대해 공감적으로 대하지 않는 모습 등이다. 교회 자체의 타락도 소재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 곧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서 편향됨이 없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사회공동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가치 혹은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정의를 밝혀야 할 과제 때문에 존재한다. 성령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강한 자 가운데, 부유함 가운데, 유명한 자 중에 계시기보다 오히려 약한 자, 가난한 자, 아무 이름을 내지 못한 자 중에 계시기를 선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공권력과 일그러진 교회의 이미지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며,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암5:24) 일이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로니클>  (0) 2012/03/20
<달팽이의 별>  (0) 2012/03/09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0) 2012/03/05
디센던트  (0) 2012/02/25
<워 호스>  (0) 2012/02/12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0) 2012/02/08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3/05 15:19

군도와 같은 가족?

<디센던트>(알렉산더 페인, 코미디, 15세, 2012)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후손이다. 비록 뼈대는 없을 수 있어도 조상 없는 사람은 없다. 조상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현재는 적어도 성공한 과거이다. 입신양명의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있도록 한 과거를 말한다. 그래서 현재는 여전히 과거와 긴장관계를 갖는다. 아니, 긴장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방향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제대로 된 현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가 흔들리면 미래 역시 사라진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예컨대, 현재에 밀려 과거와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매 한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삶은 과거와의 긴장상태를 잘 유지해야 하며, 미래에 대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 살면서도 굳이 조상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디센던트>는 ‘후손’이라는 뜻이다. 제목 자체만을 볼 때는 ‘영웅적인 조상’이나 ‘영웅적인 자손’을 떠올리지만, 사실 영화의 방점은 오늘의 삶에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가족을 새롭게 발견해가면서 과거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민족과 나라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는 현대인을 기의한다. 영화는 현대인의 삶, 특히 현대인의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무엇이 과거와의 긴장상태를 깨뜨리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지를 조심스럽게 터치한다. 그리고 가족 관계의 경우를 들면서 그 이유를 성찰한다. 현대인의 가정을 파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인생, 어떤 짐, 또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진지하고 또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스케치했다는 사실이다.

맷 킹(조지 클루니)은 하와이에서 조상의 덕을 톡톡히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많은 유산의 상속자이고 또 변호사로서 두 딸을 가진 가장이다. 부유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늘 바쁘고 또 빠듯하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돈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바쁘게 일상의 궤적을 좇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맷과 그의 가정에서 우리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삶의 단면을 본다. 현대인의 가족은 서로를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각자 바쁜 삶을 살아가고 또 그에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이런 삶으로 일상을 엮어가는 맷은 두 딸에 대한 관심은 물론 대화도 없고 아내와도 소원한 관계다. 이런 상태를 두고 맷 스스로는 가족을 마치 여기저기 흩어져 결코 서로 만나지 않는 ‘군도(群島)’에 비유한다. 그렇다. 만일 가족이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가족 모두가 오직 자신의 관심만을 좇아 살아간다면, 서로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없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형식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군도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한다. 한국영화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3) 역시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디센던트>는 문제만을 제기하진 않는다. 문제해결을 위해 여기에다 조금 다른 질문 하나를 첨가한다. 즉, 도대체 가족이 이토록 독립해서 살아가게 만든 계기는 무엇일까? 만일 가족이 군도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맷의 두 딸은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다. 제멋대로 컸다는 말을 실감나게 만든다. 아이들에게서 흔히 기대할 만한 규율도 없고 어른들에 대한 공손함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학교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관계도 정상적이지 못하고, 큰 딸의 남친을 보니 사리분별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아내는 바람났고 곧 이혼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다 결국 사고를 당한 빠진 것이다. 가족의 이런 상황은 맷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맷이 이런 위기 상황을 그동안 전혀 모르고 지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분주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맷의 군도와 같은 가족의 모습이고 또 가장 중심적인 이유로 제시된다.

영화는 이것을 폭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족의 회복을 향한 걸음을 인도한다. 아내가 사고로 뇌사상태가 되자, 비로소 맷은 가족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동안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모습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면서 놀라게 된다. 학생으로서 자녀로서 가야할 궤도에서는 한 참 벗어난 두 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이고, 엄마의 외도 현장을 목격했던 딸의 이야기를 통해서 맷은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현실을 접하면서, 맷은 어떻게 가족을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감독은 모두가 짐을 하나씩 지고 살아가긴 하지만, 그 짐을 더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관용과 용서, 그리고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가족의 일상을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대단히 인상 깊고 또 한국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딸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맷이 한 담요를 덮고 간식을 즐기며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통해, 감독은 가족이 결코 군도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서로 한 이불을 덮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가 누군가의 후손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함을 표현했다.

'필자"문화칼럼" > 최성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팽이의 별>  (0) 2012/03/09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0) 2012/03/05
디센던트  (0) 2012/02/25
<워 호스>  (0) 2012/02/12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0) 2012/02/08
<밍크코트>  (0) 2012/01/20
필자"문화칼럼"/최성수 l 2012/02/25 12:00
1 2 3 4 5  ... 6 

get rss




(110-540) 종로구 창신동 197-15호 문화선교연구원 tel.(02)743-2535 fax.(02)743-2534
Copyright @ Center for cultural Comunication. All Rights Reserved.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