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작>을 보고 - 관계를 원하지만 늘 실패하는 현대인



관계를 원하지만 늘 실패하는 현대인

<우작>



최 성 수




우작 (2004)

Distant 
5.5
감독
누리 빌게 제일란
출연
무자페르 오즈데미르, 에민 토프락
정보
드라마 | 터키 | 110 분 | 2004-11-05



시인 정호승의 시 가운데 “수선화에게”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현대인의 외로움을 잘 표현한 시라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엇에 대해 있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외로워 눈물을 흘리실 정도라고 말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표현은 외로움이 특정한 사람만이 느끼는 정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본질적임을 말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외로움은 고독과 다르다. 고독은 무리와 떨어져 홀로 있음 혹은 심리적인 소외감을 의미한다면, 외로움은 떨어져 있든 혹은 무리 가운데 있든 상관없이 대상을 그리워함으로 오는 정서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또 마음이 지향하는 관계가 부재할 때 엄습한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면, 외로움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다. 다만 나이나 시대에 따라 달리 표현될 뿐, 인간으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정서다. 현대인은 함께 있어도 심적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져 있음으로 고독을 느끼고, 고독한 중에 늘 대상을 욕망함으로 외로워한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추구하지만 계속해서 좌절한다.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소통의 부재로 오는 결과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것은 이런 까닭이다. 공존 혹은 공생 혹은 공감 능력의 부족도 한 몫 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다. 비록 자신이 찾고 또 원하는 것은 아니라도 대체할 만한 것을 확보하려 애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유사관계를 추구한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을 유혹하는 각종 상품만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이 사람(특히 이성)이나 생물(반려동물)일 수도 있다. 때로는 카페나 술집 같은 익숙한 장소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혹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편한 시간을 보내면서 혹은 오락이나 술과 같이 자신과 관계 맺는 무엇인가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외로움은 소비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자본주의 사회는 각종 상품을 통해 소비욕구를 채워주려 노력한다. 대부분은 일시적인 대체물 혹은 이미지에 불과하고, 심하면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해도, 외로운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에 적지 않게 기여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관계를 상품으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인간은 이런 관계 맺기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실제로 어떻게 보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면, 분명 2003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 <우작>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작>은 현대인의 외로움을 형상화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작’은 ‘소외’란 말로 번역될 수 있는 터키어이다. <우작>은 <작은 마을>(1998)과 <5월의 구름>(1999)과 함께 제일란 감독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다. (※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두 남자의 동거를 매개로 전개된다. 이혼한 사진작가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스탄불로 와서 그에게 얹혀사는 사촌 동생이 등장하지만, 굳이 남자에게 국한시켜 볼 필요는 없다. 인간의 외로움을 말한다. 영화는 두 남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인간의 외로움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또 어떻게 일어나고 또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성을 욕망하고, 직장을 찾고, 볼거리를 찾고, 사진에 적합한 관계를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 집에 거하면서도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항상 겉도는 모습은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일으킨다. 오히려 예전에 맺었던 관계마저도 편견과 오해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오프닝도 그렇지만 마지막 장면 역시 매우 강한 인상을 주는데, 관계를 찾아 떠나는 인간의 모습과 관계의 좌절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마지막 장면은 이혼하긴 했어도 아직까지 관계의 실마리를 놓지 않고 있는 아내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게다가 다만 며칠이라도 함께 지내던 사촌 동생마저 떠난 후다. 홀로 겨울 바닷가에 앉아 사촌 동생이 놓고 간 담배를, 그러나 자신이 쓰레기라고 말했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인이 얼마나 처량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영화를 통해 형상화한 외로움의 모습이다. 문제는 그 외로움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본다면 단순한 현상을 넘어 기독교적인 관심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외로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에 이어 동반자인 하와를 만드신 이유가 외로움(‘독처’를 외로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과의 관계를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때문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죄는 무엇보다 인간과 관련한 모든 관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관계의 단절로까지 이어졌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모든 인간의 외로움은 바로 죄 때문에 비롯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판단하며 살겠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외롭게 살지 않도록 인간을 서로가 서로를 돕는 존재로 만들었지만, 인간은 오히려 잘못된 욕망으로 다시금 외로운 상태로 전락했다. 서로를 위해 존재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이용하는 관계로 전락한 것이다. 왜곡되고 변질된 기독교는 도우려 하기 보다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려 한다. 지속적인 관계를 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원까지 이어지는 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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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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