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인간의 신념은 갈대인가? 바람인가? (조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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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타이틀 로고가 올라간 다음 상당히 긴 암전이 흐른다시야가 탁 트인 넓은 산이 화면에 갑자기 나타난다.화면 앞쪽으로 바람에 한가롭게 흩날리는 한 그루의 야자수가 놓여있다이윽고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빠지면서 창틀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한 무리의 아이들의 머리통을 차례차례 전동식 기계로 삭발한다라디오 헤드의 당신은 누구의 군대인가?’ 선율이 처절하게 흐른다카메라는 세 개의 점이 일직선으로 발뒤꿈치에 선명하게 찍힌 아이를 찾아 들어간다조용하게 관객을 응시하던 소년의 눈빛은 카메라가 다가갈수록 이내 분노로 바뀐다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놨냐고 물어보듯이.

레바논 태생 극작가인 와이디 무아와드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그을린 사랑>을 캐나다 출신 감독 드니 빌뇌브가 스크린으로 옮겼다이 영화는 올해 제83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인 어 베러 월드>와 나란히 올라 경합을 벌였다쌍둥이 남매인 쟌느와 시몽은 어머니 나왈 마르완이 남긴 유언장을 대리인으로부터 듣는다어딘가 살아있을 남매의 아버지와 형을 찾기 전에는묘비명도 쓰지 말고 심지어 관 없이 알몸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묻어달라는 내용이다시몽은 어머니 나왈이 평소에 정상적이지 않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유언장을 따르지 않겠다고 완강히 부정하지만 쟌느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그녀의 과거를 추적한다퍼즐을 짜 맞추듯 어머니 나왈의 과거를 구성하는 인물과 사건장소를 쫓는다그렇게 어머니 나왈이 지나왔던 길을 딸인 쟌느가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비장한 인생에 맞닥뜨린다. <그을린 사랑>은 종교와 전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국적은 언급하지 않는다심지어 영화 속에 나오는 지명들이 실제인지 아닌지 조차 불분명하다이러한 익명성은 폭력과 전쟁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나한테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보편성으로 바뀌어 진다적어도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관객은 단지 조용하게 쟌느와 시몽의 감정 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샌가 고통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처절한 여인그들의 어머니 나왈의 삶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을 배경으로 화면 왼쪽에는 민병대원이 서있다오른쪽에는 불타는 버스가 보인다그 사이에서 아이가 버스 안에 갇힌 히잡을 두른 엄마를 향해 달려간다민병대원은 그 꼬마를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화면에는 단발의 총소리가 울려퍼지고 아이는 그대로 고꾸라진다무지막지 한 폭력 앞에 나왈도 같이 쓰러진다그리고 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모든 인생의 굴레를 불타는 버스에 던져 버리고 신념을 바꾼다자신의 아이를 앗아간 이 미친 폭력을 끝내기 위해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하기로그러나 자신을 위한 또 다른 폭력의 결말이 인생 끝자락에서 악어처럼 그녀의 아이들쟌느와 시몽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라고 나왈은 알지 못한다.그녀는 결국 비극적 고통을 끝내고 위로 받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것보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말한다쟌느와 시몽의 탄생은 그녀가 겪은 분노의 위협을 끊어내기 위한 약속이라고도 말한다엄마의 자궁 안을 유유히 유영하듯 두 남매는 수영장에서 서로의 상처를 씻어 낸다나왈의 비극적인 삶을 함께 공유한 관객이 바라보는 영화 속 의 이미지는 처음과 끝이 다르다약간 올려다 보이는 처음의 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은 인간의 이상향이다후반부에 서 은 내려다보인다내 혈육의 피와 살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그 은 바위 한 덩어리 흙 한줌에서조차 사람들의 좋거나 그을린 기억과 추억까지도 품어낸다참혹함과 경건함이 같이 있다그리고 산은 우리에게 묻는다갈대는 지고 바람만이 남는다면인간의 신념은 과연 바람일까갈대일까이 영화마지막 반전의 충격을 떨쳐내기에는 시간이 꽤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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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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