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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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과 현실의 차이

(<트루먼 쇼>(피터 위어, 1998, 드라마, SF)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이라는 한 인간의 일생, 곧 리얼 라이프를 기획한다. 그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24시간 방송되며,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방송기획과 시나리오 그리고 세트장 안에서 트루먼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리얼 연기)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 세계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보도록 한다. 시청자들은 트루먼과 함께 일어나고 그와 함께 일을 하며 그와 함께 잠을 이룬다. 방송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트루먼 스스로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획된 것들이다. 정해진 틀에 머물러 있다면 그의 일생 동안 아무리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그는 적어도 거짓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살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난데없이 조명기구가 떨어지고, 바다에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만 이내 사라진다. 자신의 사생활이 라디오 방송에서 중계되듯이 방송되는 것을 듣고, 아내는 마치 광고하듯이 말하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반복된 생활을 한다. 크리스토프가 이런 방송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문제는 무엇일까?

트루먼의 문제는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 실비아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있는 곳을 떠나고 싶지만 아내의 반대에 부딪히고 또 조직적인 방해를 받기도 한다. 게다가 아버지 익사 사건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죄책감으로 물 공포증이 있다. 자신의 꿈인 탐험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떠나야 하고 그리고 떠나기 위해선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조차 건너질 못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는 갈망은 두려움 앞에서 번번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용기를 내어 바다를 항해한다. 물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보다 계획적으로 통제되는 삶, 자유가 없는 삶에 대한 역겨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마침내 자신이 거대한 세트장 안에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바로 이 때에, 곧 트루먼이 모든 방송의 기획을 알게 된 때에 그동안 신적인 존재로서 역할을 했던 크리스토프는 기획 의도를 밝힘과 동시에 트루먼에게 있어서 실제와 허구의 세상이 무엇임을 선언하듯이 말한다. “이 세상에는 진실이 없지만 내가 만든 그곳은 다르지. 이 세상은 거짓말과 속임수 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게 없어. 난 누구보다 자넬 잘 알어. 두렵지? 그래서 떠날 수 없지...”

마치 선악과 앞에 서 있는 하와에게 유혹하는 뱀의 음성을 듣는 듯 하다.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세상, 거짓말과 속임에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 살 것인지를 묻는 것 같다. 아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제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서 잘 알려진 질문은 이미 <트루먼 쇼>가 던졌던 질문이었다.

사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디어와 함께 아침을 시작하고 미디어와 더불어 살아가며 미디어와 더불어 잠을 청한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이 영화와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더욱 의미심장하다. 나는 진정으로 나의 선택에 따른 삶을 살고 있는가? 혹시 누군가에 의해 기획된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이것이 마치 나의 실제인 양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모에 의해, 사회의 트렌드에 떠밀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풍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우리는 허구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를 사는 듯이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 위해 영화 속 한 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비아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세트장 안의 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지만 유일하게 트루먼의 진실을 밝히려 하다가 세트장 밖으로 추방된다. 그녀는 마치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 그림자를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의 존재를 증거 하는 자와 같다. 그녀에 대한 트루먼의 그리움은 진실과 진리를 향한 갈망이다. 사진 미디어에 찍혀진 사진이 아니라 콜라쥬로 형성된 그녀의 모습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두려움과 장애물들이 있다. 그동안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 미지의 삶에 대한 염려, 그리고 인생의 각종 트라우마들을 넘어서야 한다. 비록 온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신비로 가득 차 있는 세상으로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미디어가 만든 세상에서 실제의 삶을 살기보단 차라리 불안하고 역겹고 힘들고 또 우여곡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해도 자신이 선택한 실제의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미디어 세상에 몰입하는 것은 실제 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니다. 장 보르리야르가 말했듯이 시뮬라크르, 곧 현실보다 더 강력한 현실감을 주는 실효(가상)현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우리의 문화형성과정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세상이 되고, 또 미디어 의존도가 높은 시대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 없어 소통은 불가능하며, 또한 현대인으로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잠시 미디어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미디어가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찰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미디어는 더 이상 정보 전달의 수단만은 아니다. 이제는 세상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이다. 권력이고 이데올로기이고 또한 현실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몰입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출연자들의 언어와 행위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보라. 일상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스마트 폰이 활개치고 돌아다니는지를 보라. 산업화된 미디어는-물론 공익적인 차원의 프로그램도 기획하지만-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시청자를 매료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기획한다. 그럼으로써 배우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까지도 통제하며 더 나아가 세상을 통제하기도 한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의 예언처럼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가 멀지 않은 때에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비록 실현되지 않은 채 1984년을 훌쩍 지나갔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미래사회의 한 모습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트루먼 쇼>는 미디어로 만들어진 세상에 대해 과감하게 NO!를 외치는 영화다. 우리가 힘차게 박수를 쳐주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혹시 이런 반응도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닌가?

여하든 다양한 사념적인 성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디어가 만든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정된 삶보다 비록 불안하고 역겹고 힘들고 또 우여곡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해도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이 세상 안에 우리의 꿈과 실제적인 삶이 있다. 혹시 이것을 기획 혹은 통제 혹은 연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크리스토프와 다르다. 천국은 이데올로기로서 세상에 대한 비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미디어를 지혜롭게 사용하면서도 미디어에 의해 기획되고 연출되고 또 통제되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현실인 이 세상에서 소망을 갖고 또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길 기대하며 과감하게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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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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