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선오브갓(패널: 김응교, 성석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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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0일 영화 <선 오브 갓> 개봉일에 맞춰 작은 영화관 "필름포럼"에서 시네토크가 열렸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훈훈한 열기 속에 김준영 기획실장(문화선교연구원)의 사회, 성석환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김응교 교수(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의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서 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미학과 신학의 관계 등을 나누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 의미를 서로 나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합니다. 다음은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보사인 신학춘추에서 정리한 시네토크의 내용입니다.





상상력은 예술표현의 필수적인 요소

석환 교수


# 기독교 영화를 볼 때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하는 논란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의 영화읽기, 영화와 대화하는 수준이 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픽션, 상상력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재현이 불가능한 것을 재현 불가능한 상태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던 담론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정의하고 규명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모더니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독교인의 욕망은 모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대로 안했냐'는 것이죠. 그대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 굉장히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한국교회가 맞이하는 위기와도 거의 일치한다고 보입니다. 시대적인 발상이나 상상력과 깊이들이 여전히 모던적인 구조를 가진 교회 안에서는 작동되기가 어려운 겁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영화를 볼 때, 도덕적, 윤리적, 영적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임바디먼트(embodyment)입니다. '영화로 인해 관객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어떻게 영화가 자신의 삶에 체현되고 구현되느냐' 문제입니다. 상상력을 강하게 동원해서 그것이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만들면 만들수록 관객들의 임바디먼트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상력이라는 것은 좋은 영화가 반드시 가져야 할 요소입니다.

저와 같은 신학자들은 영화가 성경적인지 비성경적인지 분석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하고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성경에서 상상해보지 못했던 행간의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이러한 표현들이 영화 자체가 가져야 할 굉장히 중요한 미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감상해야 합니다.


# 상상력의 수용 범위는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근대철학은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상력을 철학의 영역에서 거세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형식미학이 자리하면서 상상력이야말로 예술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지요. 영화의 발전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에 봉착합니다. 아무리 상상력이라고 해도 기독교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상력은 절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상상력을 어떻게 통제합니까. 그 생각 자체가 오류지요. 어떤 힘을 가지고 상상력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부작용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영화를 볼 때, 어떤 상상력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느냐, 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영화는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영화가 우리의 상상력과 대화를 하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내러티브도 분명해야 합니다. 내 삶이 신앙 안에서 명확하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명확하게 따라가는 사람만이 이 영화가 주는 상상력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한계를 설정지을 수는 없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상상력의 강도는 달라질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상상력이 명확하게 명시하는 방향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소비자의 삶, 소비자의 고백과 신앙이 명확할 때 그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픽션과 논픽션을 따지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김응교 교수


# 노아와 선 오브 갓을 두고 '뉴에이지 혹은 프리메이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성경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상상력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냐 허구냐'라고 할 때 거짓이 아니라 허구였어요. 그걸 비유라고 해요. 상상력, 뻥을 사용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에요. 사실은 없던 얘기죠. 생각해보면 사마리아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실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겨자씨의 비유나 나사로의 이야기도 다 허구, 상상력을 이용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다니엘서 1장 17절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주셔서 우리가 '모든 서적'을 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별력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계속 뉴에이지다 프리메이슨이다, 하면서 한국교회 성도들을 자꾸 에이즈 환자로 만들어요. 에이즈 환자는 면역력이 약해서 작은 감기에 걸리기만 해도 목숨을 잃거든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마귀가 있다면서 접하지도 못하게 해서 점점 면역력 자체를 떨어뜨리고 있어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실 성경 자체가 빛과 소금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빛이라, 소금이라고 선언을 했거든요. 그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싸울 필요도 없고 거기서 빛으로, 소금으로서 단지 이야기하면 되는 건데, 그게 아니라 게속 피하게 만들어요. 겁쟁이로. 그래서 선 오브 갓이나 노아와 같은 영화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까워요. 사과와 냉면을 먹는 든든한 위장을 가질 수 있도록 세계 여러 주변 인문학에 대한 소화력과 비평력을 키우는 것이 오늘날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필요한 관점은?

문학적으로는 다큐멘터리, 르포로 따지라면 픽션과 논픽션을 50% 기준으로 삼아요.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저에게 뻥으로 저를 교육하셨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물을 먹는 병아리를 보며 "병아리가 지금 뭐라고 그러는지 아니? 물어봐~" 제가 "안 들리는데요." 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 들려?" 하시는 거에요. 그런 후에 병아리가 삐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그렇게 들려요. 또 파리가 밥 위에서 손을 비비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응교야 지금 파리가 뭐라고 그러는지 아니? 잘 들어봐~" 그러시면서 "인간의 밥 위에서 밥을 먹어서 미안해요.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손을 비비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걸 중학교 2학년까지 믿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거짓말쟁이였을까요? 어머니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죠.

목사님들도 사실 뻥을 많이 쳐요. 예화를 들면서 전혀 없는 이야기로 말이예요. 그런데 그 목사님을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이냐는 말이예요. 사실은 아니지만, 그 설교에서 나오는 예수님 마음을 믿는 거죠. 에수님의 비유도 완전히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예요.

사회적인 문화예술 기법으로 논픽션이냐 픽션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상상력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이고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일지에 집중해야 해요. 그 작가의 의도에 오류가 발생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판단되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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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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