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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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같은 사람

<버니>(리차드 링클레이터, 범죄, 드라마, 2011)

 

(스포일러 있음)

영화 내용의 중심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장의사로서 동네에서 천사로 알려진 버니는 동네에서 소문난 구두쇠이자 까칠녀로서 가족조차도 만나기를 꺼려하는 미망인 마조리를 살해했다. 등 뒤에서 네발의 총을 쏜 후에 죽은 그녀를 9개월 동안 냉동고에 숨겨 놓았다. 마조리의 안부를 묻는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몸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있고 이 사실을 그녀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버니의 설명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과 변호사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었고, 마을 전체는 발각 뒤집어졌다.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친구 사이로 알려졌기에 사건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버니는 그녀가 자신의 자유를 너무 구속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고 일말의 변명도 없이 자백했음에도 동네 사람들은 믿으려하지 않는다. 설령 살인했다고 해도 분명 미망인의 횡포가 심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동정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이중적인 면모에 대해 오히려 더욱 혐오스러워 해야 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고, 내용은 다소 코믹한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범죄 드라마가 갖는 긴장감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이 영화는 비포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건의 진상을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감독은 영화의 메시지를 동네의 한 여인의 말에 담아 놓았는데, 우리 사회에 버니와 같은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버니는 누구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버니는 전도사가 되고 싶었으나 장의사의 길을 택했다. 버니가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까닭은 친절했기 때문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고인을 보내고 난 후에 슬픔에 빠져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자비를 털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여겼고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선행과 친절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번져 동네 사람들은 버니 때문에 기뻤고 또 행복해했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마조리와 친구관계를 맺게 된 것도 그녀의 남편을 보내고 난 후에 그녀를 위로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버니의 친절은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거듭 찾아간 버니는 마침내 마조리에게 진심을 인정받게 된다. 버니에게 마음을 열은 마조리는 버니와 여행을 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유에 대한 권한까지도 넘겨주게 된다. 한 가지 문제는 버니를 독점하다 못해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마조리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 한, 버니는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긴 삶을 살아야 했다.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마조리의 돈으로 버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선행을 더 많이 베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힘든 상황이라도 참으며 지내려 했으나 버니는 우발적으로 그녀를 총기로 살해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이 버니의 살인 행위에 대해 동정의 마음을 표하는 이유는 마조리의 돈이 자연스럽게 버니의 돈이 될 수도 있었고 또한 그녀를 죽인 후에 시신을 숨기거나 혹은 돈을 챙기고 도망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버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양원에 있다고 말한 후에 사망의 시기에 맞춰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조리의 돈으로 버니에게서 선행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버니를 결코 범죄자로 보지 않았다. 물론 검사의 생각은 달랐다. 검사에게 버니는 등 뒤에서 네발이나 총을 쏘고 냉동고에 9개월 동안 은폐한 뒤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스럽게 선행을 하며 지낸 잔혹한 살인자이며 이중 인격자였다.

버니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다. 궁극적인 판단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겠지만, 사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은 동네 사람의 입을 빌어 버니 같은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에 대한 감독의 평가를 노출시켰다. 도대체 버니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버니는 자신의 직업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버니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다

버니는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선행을 베푼다

버니는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행복을 느끼게 만든다

버니는 어디에 있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산다

버니는 마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을 안다

버니는 사람들을 세워주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버니는 이런 사람이었다. 살인 행위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천사라고 불려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재소자들에게 자신의 일관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생활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정신과 가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의 살인 행위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며, 그의 평소 행위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오늘날 이런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이런 사람을 찾아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현실이다. 미국의 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살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버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오늘날 그만큼 버니 같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정신과 가치를 구현하는 사람을 만나볼 수 없기 때문에 버니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버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과 행위를 돌아보게 한다.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선한 행위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있다. 그렇다고 선한 행위가 범죄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명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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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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