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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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상처와 힐링

<아이, 애나>(바나비 사우스콤, 로맨스/멜로, 2012)

 

다소 특이하면서도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영화다. 특이한 까닭은 먼저 감독이 여배우(샬롯 램플링)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60대 남녀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 중년기를 보내는 남녀의 욕망을 소재로 삼고 있다. 세 번째는 이야기가 범죄 스릴러의 형식에 담겨 있는 것이다. 긴장감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서 로맨스의 달콤함에 대한 기대에 젖어있지 못하게 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현대인의 고독과 상처를 일부러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오직 배우들의 표정연기와 미장센, 곧 느와르적인 도시 분위기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는 현대인의 상처와 힐링을 이야기한다.

어쩌다 보니 결론부터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마 영화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에 매료되다보니 글을 쓰는 패턴과 리듬감을 잠시 잃었던 것 같다. 일단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는 엘자 르윈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소설의 이야기는 1990년대 미국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뉴욕의 분위기를 런던으로 옮겨오면서 감독은 이야기를 과감하게 각색하고, 특히 미장센에 있어서 보다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고 한다.

60대의 애나는 남편과 이혼한 후에 런던에서 혼자 살고 있다. 핸드폰보다는 공중전화를 즐겨 사용한다. 잦은 옷차림의 변화는 그녀가 여전히 삶의 생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외롭고 고독한 정서로 가득하다. 그 이유는 단지 혼자이어서가 아니라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손녀와 함께 시내에 갔을 때 남편과 공중전화 통화 후에 받은 충격 때문에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있는 사이에 손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이 일은 애나에게 큰 상처가 되어 그녀의 일상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애나는 남편과의 이혼에 이어 손녀를 잃은 후에는 딸마저 자신을 떠나는 엄청난 상실감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누가 이 여인을 그 깊은 외로움과 상실감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상실감과 외로움 그리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마침내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싱글파티에 참여한다. 오래 전에 딸이 권해준 것이었지만 그토록 주저했던 일이었다. 젊은 남자들의 눈을 사로 잡기에는 이미 늙었다고 체념하지만, 우연히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한 남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서 만난 남자와의 관계에서 본의 아니게 살인을 범하게 된다.

 

베테랑 경찰 버니(가브리엘 번)는 아내와 별거중이다. 생기가 전혀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할 뿐, 일에 대한 소명도 없고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고층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추적하다 우연한 기회에 애나를 보게 되고, 한 번 본 그녀의 매력에 압도된다. 자동차 번호를 조회하여 그녀를 찾아 낸 후에 버니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얻는다. 두 사람은 몇 번의 만남에서 서로가 매우 가까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만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애나에게서 버니는 갑자기 낯설음을 느낀다. 마침내 살인사건의 범죄자가 애나임이 밝혀지자 버니는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경찰에서는 속히 체포하라고 하지만 그녀의 외로움과 트라우마를 알게 된 버니에게 그녀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 애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데, 바로 이 순간에 나타난 버니는 그녀에게 위로자요 치유자이며 또한 구원자였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버니는 애나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녀가 어떤 일을 저질렀든지 이미 그의 마음에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중년 말기의 남녀의 로맨스를 넘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상실감을 이야기 한다. 가족의 해체로부터 오는 상실감과 단절감, 그리고 그 때문에 엄습해오는 패배의식과 좌절감, 그리고 관계의 단절과 관계에 대한 욕망 등등. 단편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어 이야기의 전모를 더 이상 재구성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의식과 삶을 지배하며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과거의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을 만나거나 혹은 이성과의 사랑을 통해 외로움을 이겨내 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허탈감만을 가득 안고 돌아오게 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불현 듯 나타난 만남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원하는 형태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든지. 도대체 이런 반복되는 단절과 외로움 그리고 상실감에서 현대인을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를 보면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필자는 모든 것을 헛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경지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솔로몬의 지혜가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이 주는 위로는 일시적일 뿐이다. 그것은 죄로부터 기원하는 깊은 고독과 상실감이기에 그 어떤 것도 인간을 결코 온전히 위로해주지 못한다. 하이델베르크 소요리 문답 첫 번째에서 묻고 또 대답하고 있듯이, 인간의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며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는 그분에게서 또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 애나>는 그리스도인에게 고독과 상실감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현대인의 구원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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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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