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嫌惡)의 바다를 메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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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가사가 하나 생각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남진, ‘가슴 아프게’ 중)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바다가 있다. 어떤 바다일까?


첫째는 성(性)이라는 바다다. 세상엔 남성과 여성이 있는데 그처럼 먼 거리도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눈에 보이는 신체적 특성부터 전혀 다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가장 닮았으면서도 가장 다르다. 남성과 여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도 서로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남성은 여성에게 신뢰, 인정 같은 것을 기대하는데 여성은 남성에게 관심, 이해 같은 걸 기대한다. 또 여성은 남성이 들려주는 말을 오래 기억하는데, 남성은 여성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과 여성의 다른 점은 서로에게 불편할 수도 있지만, 유익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남성만 산다, 여성만 산다고 상상을 해보라.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보완적인지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성만이 채워줄 수 있는 넓은 빈 공간을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래서 이성은 우리에게 참 소중한 존재다.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우리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이성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진정한 공부다. 이성의 특성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서로 충돌하며 긁고 긁히며 상처를 낸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딸은 아버지를, 아들은 엄마를, 아버지는 딸을, 어머니는 아들을 연구해야 한다.

둘째는 세대라는 바다다. 옛날에는 30년을 한 세대로 구분했다. 조부모, 부모, 자녀 간의 나이 차를 30년으로 봤다. 그러나 시대 환경의 변화로 세대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쌍둥이도 세대차를 느낀다고 할 정도다. 세대는 성장 환경이 만들어낸다. 밀가루 반죽을 붕어빵 굽는 그릇에 넣고 열을 가하면 붕어빵이 나오지만, 그걸 호떡 굽는 철판 위에 놓고 열을 가하면 호떡이 된다. 같은 재료라도 어떤 틀에 넣어 어떻게 익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제품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느냐에 따라 관점, 가치관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농경사회, 산업화 사회 출신이 서로 다르고 산업화 사회, 정보화 사회 출신이 서로 다르다. 다이얼 전화기 세대와 버튼식 전화기 세대가 서로 다르고, 삐삐세대와 이동전화기, 스마트폰 세대가 서로 전혀 다르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이민세대, 디지털 세대 간에도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가정, 직장, 학교, 교회, 사회 전반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 간 단절 현상에 대해 프랑스의 어느 신문은, 요즘은 소속 국가를 기준으로 한 공동체의 유대감보다 전 세계 10대 청소년들 간의 유대감이 더 강하다고 했다. 먼저 세대가 다음 세대를, 다음 세대가 먼저 세대를 서로 싫어하는 현상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셋째는 성격이라는 바다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성격을 타고난다. 성격은 서로 다른 것이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빨강과 노랑을 놓고 우열을 따질 수 없는 것처럼. 선인들은 여러 기준으로 비슷한 성격끼리 유형을 만들어봤지만, 이 세상에 똑같은 성격은 없다. 좋은 성격, 나쁜 성격도 없다.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성격을 열등하게 여기려 한다.

계곡 개울의 돌은 대부분 뾰족하지만, 하류 개울의 돌은 동그랗다. 굴러 내려오면서 뾰족한 부분이 닳아서다. 사람은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다보면 모가 난 부분이 부서져버린다.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나의 성격의 요소를 스스로 다듬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나를 맞춰나갈 줄 알아야 한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는 것이..... 우리가 성 차이, 세대 차이, 성격 차이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 사회, 우리 삶에는 평화가 넘칠 것이다.

얼마 전 가까운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우리나라와 일본 해엽에 해저터널을 만든다면 찬성하겠는가?” 반대가 대부분이었다. 터널을 만들면 일본이 우리에게 해로움을 끼칠 것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소통을 강화하면 서로에게 유익할 거란 응답은 거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일본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건너기 힘든 깊고도 넒은 바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고 우리는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으로 일본을 가장 싫어한다. 양국 국민들 마음에 신뢰의 터널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혐오(嫌惡)’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혐오(嫌惡)’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어쩌다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고(여혐),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게(남혐) 되었는가. 나아가 세대 간의 갈등도 가정, 직장, 교회, 학교, 사회 곳곳에서 심한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이 부자, 권력자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부자, 권력자가 힘없는 사람을 혐오하고 괴롭히는 갑질 현상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정치인을 향한 유권자들의 혐오도 심각한 수준이다. 종교를 향한 혐오도 심상치 않다.

혐오에는 뿌리가 있다. 혐오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남자와 여자, 젊은 세대와 장년 세대,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들이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할 때 싫어하고 미워하게 된다. 혐오는 나는 맞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편견, 피해의식에서 온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혐오는 공동체의 소통, 관계를 막는 바다다. 이 바다는 다름의 이해로 메울 수 있다. 이 바다는 상대에게 아픔을 주는 누름의 중지로 메울 수 있다. 이 바다는 상대방의 존중으로 메울 수 있다.

존중은 혐오를 치료하는 특효약이다. 다른 성을 존중하자. 다른 세대를 존중하자. 다른 성격을 존중하자. 그래야 그들도 나를 존중한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왜 서로 싫어하고 미워하며 살려 하는가.


이의용 교수(국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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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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