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상류사회> 읽기: 욕망을 전시하여 욕망을 예방하다



임권택 감독은 <하류인생>(임권택, 2004)에서 생존을 위한 존재로 전락한 사람들을 ‘하류인생’으로 보고 광복 후 자유당 시절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그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하류인생>은 상류사회에 속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은 충일하나, 그것은 오직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뿐이며, 상류층 사람들의 안정된 삶과 이익을 위해 소비될 뿐임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시대와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과연 21세기 하류인생의 모습은 어떨까?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개성을 추구하고 소확행을 누리며 사는 등 과거에 비해 모양은 바뀌었으나, 상류층에 속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또 그들의 욕망을 위해 소비되는 인생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변혁 감독의 <상류사회>는 상류사회에 속한 사람들과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가길 원하는 두 남녀(박해일, 수애)의 욕망을 통해 천박한 상류사회의 민낯을 드러낼 뿐 아니라 권력과 돈과 성과 명예에 대한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을 폭로한다. 그들 역시 중상층에 속한다는 점에서 하류인생과는 다르다 해도 내용으로는 <하류인생>의 다른 버전을 보는 듯하다. 영화가 상류사회를 재현하는 과정과 관련해서 논란이 일고 있기에 그리고 영화 속 상류사회 이외에 또 다른 면이 있다는 전제 하에 필자는 영화 속 상류사회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천박한’이란 형용사를 첨가했다. 천박한 상류사회라 함은 겉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치장되어 있어 화려하나 속은 인간 이하의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썩은 내를 풍기는 사람들을 말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를 정복하고 또 이용하길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도 최고의 자리까지 더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 그리고 돈의 힘과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겁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이다.

영화는 상위 1%인 상류사회(정치와 문화계)에 속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고, 소수에게 허락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어떤 파열음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그것의 종말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들은 상류사회를 꿈꾸고 또 그들의 삶의 방식 및 논리를 따라가면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의 시비를 가리는 일들 정도는 가볍게 여긴다. 정신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육체적인 것들을 경시하면서도 자기 육체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선 인간사회에서 소중하게 지켜져야 할 가치들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인간성 상실, 몰염치, 철면피, 불법, 편법, 뇌물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애를 써보지만 결국 겁 없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만 당할 뿐 결코 얻지는 못한다. 현실에서는 간혹 이런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영화는 권선징악의 원칙에 충실하게 연출되었다. 사회성 영화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연상케 하면서 분노를 자극하고 권선징악의 논리로 심판함으로써 정의 실현의 대리만족을 준다는 것이다. 종종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이어지지만, 대체로 현실은 변화되지 않아도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때도 있어 씁쓸하다. 이런 점에서 <상류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 <상류사회>가 추구하는 목적은 다만 천박한 상류사회의 욕망을 폭로하는 데에 있지는 않다. 만일 그랬다면 <상류사회>가 천박한 상류사회를 심판하는 방식은 기존의 도덕과 윤리와 정의에 의지해서 접근하는 기존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변혁 감독은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곧 상류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욕망이 서로 충돌하여 붕괴하는 모습이 아니라 상류사회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천박한 상류사회를 폭로할 뿐 아니라 잘못임을 주지하고 있음에도 근절되지 않고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을 꼬집는다.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이로써 비록 작은 규모라도 마땅히 지켜야 할 정도와 가치를 저버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관객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영화 말미에서 수애가 미술과 관장이 되기 위해 시도했던 자신의 욕망을 전시하는 퍼포먼스는-생존을 위한 전략으로서 정치적인 의미가 없진 않아도-그것이 영화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해서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 부분은 특히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욕망을 전시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부분을 좀 더 생각해보자.

성경은 남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볼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남의 눈에 있는 티와 내게 있는 대들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이 말의 본 뜻은 소위 티를 갖고 있다는 타자 역시 같은 시각으로 자신과 타인을 볼 것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누구도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이다. 자기에게 대들보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있는 티를 비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눈 속의 티를 지적한다면, 이는 자신에게 있는 대들보가 드러나지 않기 위한 자기 방어 전략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대들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일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대개 자신에게 무엇이 있는지 모르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 채 다른 사람의 결점만을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면 그때 비로소 꼬리를 내리는 일이 다반사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비극을 겪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세워놓을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를 말씀에 비춰봄으로써 자신의 대들보의 실체를 보고 회개한 후에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며 다른 사람의 티를 지적하는 것보다 더 큰 효력이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 그러니까 내게 있는 대들보를 드러내어 전시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죄의 고백은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 야고보서 역시 주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죄를 고백하면서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인정욕구가 있다. 자기 자신의 흠과 부족을 먼저 드러내는 것은 인정을 추구하는 욕망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사회적으로 매장되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결국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만한 동기를 얻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실천한 사람은 루소다. 자서전보다는 반성문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기술한 『참회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며, 앞으로도 흉내 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 하나를 발가벗겨 세상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이다.”

참회록을 처음 쓴 사람이 루소는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솔직하게 드러낼 목적으로 참회록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의 의미를 자신을 발가벗겨 전시하는 일로 보았다. 참회록을 한편의 셀프 누드화를 감상하듯 그렇게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살아온 모습과 그것을 성찰하여 얻은 교훈들을 기록하여 남이 읽도록 했으니,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기장을 읽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수치심을 빗대어 그렇게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발가벗겨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분명 부끄러운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루소가 감행한 까닭은 발가벗은 자신을 전시함으로써 참회록을 읽는 독자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루소의 참회록은 독자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었다. 

스스로를 발가벗겨 사람들로 볼 수 있도록 전시하는 일은 기독교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다. 예컨대 1907년 평양의 부흥을 이끌었던 것은 길선주 목사(당시 장로)의 죄의 고백이었다. 그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죄나 혹은 죄로 깨닫지 못한 죄들의 실상을 돌아보게 했고, 죄의 자각과 고백 그리고 삶의 변화로 표현된 신앙 및 회개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부흥은 성도들의 회개 운동, 곧 자신을 발가벗겨 성도들에게 전시하는 일들을 통해서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정의에 대한 외침은 많고 정의 실현을 위한 열정이 뜨거운 것에 비해 변화가 더디게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정과 부패를 인지하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드러내는 일은 많았어도 정작 자신의 잘못과 숨겨진 욕망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용했기 때문이 아닐지 싶다.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는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발가벗겨 세상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일, 곧 우리의 욕망을 전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며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의 죄를 고백하여 전시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서 다른 어떤 방식보다 더욱 확실하고 또 전망이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을 전시하여 먼저는 내가 봄으로써 욕망의 실상을 깨닫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할 때, 비로소 나도 모르게 그런 욕망에 빠져들게 하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많은 영화이지만 성공과 번영과 명예를 위한 자신의 욕망을 전시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느껴보기에는 괜찮은 영화라 생각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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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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