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난민 이슈를 접하면서 기독교윤리를 생각하다-주고받음에서 거저 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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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타인을 배제하고 혐오해온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마르타 누스바움은 인간의 혐오(미움)와 수치심(역겨움)에 주목한다. 이러한 인간감정의 활동은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고, 공적규제와 통제 메커니즘을 만들어서, 도덕과 법 성립의 한 근거를 제공한다.[각주:1] 한편 르네 지라르와 조르조 아감벤은 인간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지라르는 서구 문화는 폭력에 대한 면역의 결과로, 무의식의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은 ‘성스러움’으로 포장되었다고 한다.[각주:2] 수많은 제의 속에 죽음을 당하는 희생의 대상(타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이 만들어진다.[각주:3]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호모 사케르는 로마의 법적 전통에서 범죄자로 고발당한 사람들이다). 호모 사케르는 법이나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대상으로, 그들에게 사케르(신성하다)는 말이 부여된 것은 이들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의미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는 법(사회)적 영역과 종교(희생제의)적 영역을 벗어난 ‘절대적인 살해 가능성에 노출된 생명’이다.[각주:4] 이와 같이 인류의 심리 기저에서 혹은 외적 폭력의 형식으로 퍼져있는 혐오와 배제의 메커니즘은 우리 사회에서 ‘희생양’과 ‘호모 사케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최근에 한국 사회에 크게 대두된 예멘 난민 이슈다. 2015년에 발발한 예멘 내전 이후 수많은 예멘인들이 강제징집을 거부하면서 예멘을 탈출하고 있다. 그중 549명이 올해 말레이시아를 경유해서 제주에 입국했다. 지난 5월에 이들 중에 51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현재 본국으로 돌아갔거나 다른 나라로 간 일부를 제외한 480여명 가량이 제주도에서 난민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난민신청을 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난민 반대 청원이 현재 70만 명 가량을 훌쩍 넘어 버렸다. 급기야 대한민국 행정부는 난민 심사를 꼼꼼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또한 지난 6월 1일 이후로 예멘인들은 더 이상 제주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없도록 조치하였고, 지난 5월 법무부에서는 난민 인권 보호를 위한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배제와 혐오의 표현들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시사저널에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댓글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이들에게 가해지는 혐오 표현들은 ‘이슬람(무슬림)’, ‘여자’, ‘테러’, ‘범죄’, ‘강간’, ‘취업’, ‘일자리’ 등이 등장한다.(원문 보기)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심각한 이슬람공포증을 드러내면서 테러나 비도덕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작은 도움들을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혐오 현상을 일부 극우 정치세력과 종교기관(특히 보수기독교)이 부추기고 있다. 

<출처: 시사저널>


ⓒTegxedo​.com

현재 한국 사회는 난민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이 매우 미비하다.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난민들을 혐오의 태도로 대하면서, 그나마 있는 미비한 대책마저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이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1992년에 세계 ‘난민이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고 2013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난민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우는 2.6% 정도로 다른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비율(38%)에 비하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수준이다. 이런 미비한 국가 대책과 함께, 한국 사회는 지난 두 달간 난민 혐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앞서 언급한 난민 반대 국민 청원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난민 반대 시위를 하고 있고, 또 정치인들을 비롯한 종교·사회단체들이 난민 반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7월 11일에는 야당의 김모 의원을 중심으로 ‘난민법 개정을 위한 국민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은 난민보호법의 허구성을 주장하고, 난민들을 범죄집단으로 몰면서 이슬람 세력인 이들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였는데, 참석한 500여명의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에 박수를 보냈다. 또한 지난 8월2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는 ‘제주난민대책도민연대’라는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서 법무부가 지난 5월에 발표한 난민지원정책을 비롯한 국가 인권정책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난민 혐오 현상은 각종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있다. ‘예멘 난민들은 한국에 취업하기 위해서 들어온 가짜 난민이다’, ‘난민을 수용하면 성범죄가 증가한다’, ‘정부가 1인당 138만 원을 지원한다’는 등의 뉴스가 그 대표적인 내용이다(원문 보기). 이와 같이 난민에 대한 배제와 혐오, 무지와 미비한 대책 등이 겹치면서 한국 사회는 난민들을 극한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치·사회적으로 볼 때에,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난민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 대한 개선과 함께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과 기준으로 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국민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준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 못지않게 기독교(종교)가 난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토대를 준비해야 한다. 기독교는 혐오의 현상들을 이용하거나 부추기는 방향이 아니라, 정의가 올바로 세워지고 사랑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이를 위해서 사랑과 정의의 윤리가 깊게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실현되는 정의를 윤리적으로 실천하는 길은 어렵다. 은혜와 용서를 기초로 하는 사랑과 정당한 몫을 주는 정의는 서로 상반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윤리이다. 이것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해 주어라’는 말로 표현되는 윤리의 황금률이다. 한국 사회에 다가온 난민 혐오의 이슈를 정의의 관점에서 황금률을 따르는 방향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런 해결책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의가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폴 리쾨르는 누가복음 6장 27-36절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주목하면서 윤리의 황금률을 넘어선 새로운 윤리에 대해서 말한다.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주고받음’이 아닌 ‘거저 줌’을 실천하라고 한다. 누가복음 6장 31절에서 예수는 황금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는 이런 호혜적인 관계는 죄인들도 다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리쾨르는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일대일의 상호관계에서 오는 “쌍방의 정의”가 아닌 일방적으로 주는 ‘선물’의 개념을 강조한다. 그는 이를 ‘선물경제’라고 부른다. ‘되돌려주는 관계’가 아닌 ‘거저 주는 관계’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강조되는 ‘등가의 논리’가 아닌 ‘넘침의 논리’이다. 리쾨르는 이를 황금률을 기초로 한 윤리를 넘어선 ‘초윤리’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랑의 윤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리쾨르는 황금률을 새롭게 해석한다. 황금률은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단순한 ‘주고받음’의 관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초윤리의 사랑명령을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의의 형식이 구체화 되는 가운데에서 사랑명령이 녹아들어갈 수 있다.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주고받음의 관계를 넘어서 사회 속에서 사랑명령을 실천함으로 사회적 호혜성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의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각주:5]

배제와 혐오는 우리들의 심리 기저의 수치심(역겨움)이 사회적으로 표현되면서, 도덕이나 법률과 같이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합리적(?) 폭력의 기저로 작용하고, ‘희생양’과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점점 더 파괴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배재는 우리를 점점 더 악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폴 리쾨르가 가르쳐준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주고받음’의 정의를 넘어서 사랑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거저 줌’의 윤리가 우리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성신형: 필자는 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에서 기독교교양과목을 강의하면서 반기독교적인 경향을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기독교적인 가치를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 편집이사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틸리히와 레비나스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 대한 글과 책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1. 마르타 누스바움, 조계원 역, 『혐오와 수치심』 서울: 민음사, 2015. [본문으로]
  2. 르네 지라르, 김진식/박무호 공역, 『폭력과 성스러움』 서울: 민음사, 1997 [본문으로]
  3. 르네 지라르, 김진식 역, 『희생양』 서울: 민음사 1998 [본문으로]
  4.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역 『호모 사케르』 서울: 새물결, 2008 [본문으로]
  5. 김혜령, “폴 리쾨르의 ‘선물경제’ 개념으로 살펴본 사랑과 정의, 『현대유럽철학연구』 제39집(2015), 133-159; 폴 리쾨르, 박건택 역, ”사랑과 정의“ 『신학지남』 . 제239호 (1994), 232~253; 같은 글, 최현 역, 『시민과 세계』 제7호(2005), 490~5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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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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