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과학-4] 인간, 그 특별함에 대하여- 진화역사 안에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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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초년생 민수는 대학 4년 동안 성실히 학과 공부와 취업 준비에 매진했다. 틈틈이 연애도 하고, 학우들과 우정을 쌓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선후배 관계도 괜찮게 형성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새벽마다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주는 신실한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를 통해 항상 "너는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오며 힘을 내서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민수는 졸업을 하는 동시에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취직 할 수 있었고, 곧바로 안정적인 사회생활로 진입할 수 있었다. 

취업이 어렵다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어찌 보면 꿈과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민수의 어머니는 민수가 취업을 하게 된 것이 아들의 성실한 노력이 되었지만, 그녀가 신실히 믿어온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민수는 그리 신앙이 깊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이 다분히 행운이라고 여긴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신앙인은 하나님의 실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깊이 들어간다면 “신앙”은 무엇이고,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무엇이며, “실재한다”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복잡하고도 난해한 신학적-철학적 논의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전문적인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인식주체의 상상력이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에 의미를 부여함에 의해서 유추된 존재가 아니라 인식주체와 모든 존재하는 자들과 의미 공간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의 근원과도 같은 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유하는 “나”와 일정 부분 독립되어 존재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실재성은 모든 사람에게 자명하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하나님 만남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자연현상이나 존재하는 것이 특정한 사건을 통해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는데 이를 계시적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은 시작된다. 그렇게 본다면 위의 예에서 민수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취업에 성공한 사건이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우연의 결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진화를 통해 인간이 출현한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사건은 큰 틀에서 신앙의 관점을 통해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자연과정으로써의 진화과정 그 자체는 하나님 창조의 실재성 여부를 확증해주지도 않거니와 반증(falsify)해주지도 않는다. 유전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이 출현하였다는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를 입증해주지도 않지만, 동시에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주장을 들었을 때, “잠깐! 좀 이상한데...”라는 반응을 한다면, 내가 “창조”라는 단어를 “기적적인 형태의 행위”로만 규정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기적적인 형태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비기적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물론 성서는 분명 기적적인 형태의 하나님 행위를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동정녀를 통해 태어나셨고,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행위를 통해 일어났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신앙의 선언이 반드시 기적적인 형태의 하나님 행위를 상정해야만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는 극적인 형태의 기적일 때에만 “하나님의 행위일까?”

필자는 앞선 글을 통해 다윈 진화론에 제기된 혐의 중 하나가 인간의 존엄성 훼손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인간이 다른 여타 생물들과 함께 공통조상으로부터 진화과정을 통해 출현하였다는 다윈의 주장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여타 동물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고, 그 특성을 통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창세기 1장의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형상”을 이성적 능력, 관계적 능력, 혹은 이타적 능력으로 이해하면서, 인간의 해당 “능력들” 혹은 “속성들”이  여타 동물들과 인간을 구분해주며, 그러므로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능력들을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여타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 할 수 있을까? 동물 행동학자인 리차드 도킨스와 사회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 등은 인간의 능력들이 실상 인간 이전의 동물들에게도 있었음을 지적한다.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들은 도구를 사용하여 일정 부분 자신의 이익과는 무관한 상황에서 이타적으로 다른 동류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펭귄들은 극한의 추위 상황에서 다른 개체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허들링이라는 것을 실행한다. 윌슨과 도킨스에 따르면, 동물들도 이성적이고, 이타적이며, 관계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존재론적 특별성 혹은 존엄성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일 것인데, 이는 무슨 의미일까? 미국 휘튼 대학의 구약학자 존 월튼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부여된 “기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조 이야기가 쓰인 고대 근동의 상황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형상”이라는 것은 보통 왕이 해당 지역을 통치하지 못할 때, 대신 세워두는 조각상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어떠한 속성이나 능력을 부여받았다기 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기능 혹은 역할을 인간이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신비한 능력이나 속성을 줘서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위임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특별성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특별성이 주어진다.  

나아가 월튼은 현대와 고대의 “창조” 이해가 다름을 지적한다. 현대는 과학기술문화 시대이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떠한 것이 물질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곤 한다. 컵이 창조되었다는 의미는 컵을 구성하는 재료로부터 해당 컵의 물질적 구조와 배열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대에는 어떠한 것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전체 질서를 유지하고 창출해내는데 상응하는 기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컵이 창조되었다”는 명제는 고대의 창조 이해 안에서 보자면 “목마른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을 담는 기능”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컵이 만들어진 후에 해당 컵이 물을 담아 마시는 기능이 아닌 장식으로써만 사용되고 있다면 그 컵은 존재하는 것도, 창조된 것도 아닌 비존재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월튼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에 기능을 부여하고, 그 기능들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 질서를 잡아가는 이야기로 이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물질이나 사물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화과정을 통해 출현한 인간에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위임하셨다면, 그러한 맥락에서 기능을 부여하셨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를 특별하게 만드셨다”라고 신학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월튼식의 창조 이해가 받아들여 질 수 있다면, 현대 진화론이 제시하는 인간의 출현 방법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지도, 인간의 존재론적 특별성을 배격하지도 않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대경(명지대학교)

학창 시절 배운 자연과학 이론들 때문에 종교에 회의적이었다가, 회심 체험 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생명의 기원과 하나님 행위(Divine Action)”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명지대학교에서 교목 및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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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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