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 3: 어둠 속의 빛> 읽기: 교회 비판의 시대에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대학 속 교회의 자리 

영화는 대학 속의 교회와 교회의 존재 의미에 관한 성찰을 담은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전편에 비해 연기와 연출 면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신은 죽지 않았다 2>에서는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관련해서 일어난 법정 다툼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에 관해 성찰한다. 전편에서와 같이 다툼의 여지가 많은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 ‘대학 속 교회’를 소재로 사용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한 것 같다. 

하나는 그동안 부모와 함께 지내면서 교회 문화에 익숙하고 성경에 관해 전혀 의심해보지 않았다가 대학에서 과학적인 세계관을 접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 깊은 혼동을 경험하는 청년들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비판을 받고 있고 또 과학적인 세계관이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시기에 교회의 의미를 성찰하기 위해 매우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청년들에게 대학 속 교회는 세상 속 교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청년들이 대학 문화를 접하면서 겪는 갈등은 기독교인으로서 성인들이 세상에서 각종 세상의 원리들을 접하면서 그로 인해 신앙 정체성에서 혼동을 겪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 속 교회를 소재로 삼은 것은 ‘교회와 세상의 갈등 구도’로 독해할 수 있다.(이어지는 다음 편에선 대학 졸업 후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겪는 신앙의 갈등 문제를 다룰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특히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시대임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제목을 ‘교회 비판의 시대에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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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점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대학을 흔히 ‘상아탑’이라 부른다. 취업률을 대학 평가 기준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더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현실은 그렇더라도 대학이 상아탑이라 불리게 된 이유만큼은 영화 이해를 위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아래의 글은 두산세계백과 참고)  

상아탑이란 원래 아가 7장 4절에 시인이 여성을 표현하면서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성모 마리아에 적용되어 마리아의 별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말이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프랑스 비평가 생트 뵈브(Charles Sainte Beuve)이다. 그는 낭만파 시인 알프레드 비니(Alfred Victor de Vigny)의 시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두고 비판하는 의미에서 “상아탑(tour d'ivoire)”이라는 말을 썼다. 유럽의 대학은 이 말을 차용하여 학문을 탐구하는 대학의 특성을 상아탑이란 말로 표현했는데, 이로써 상아탑은 현실과 동떨어져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을 지칭하여 쓰기도 한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대학과 교회의 갈등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엄밀한 학문을 추구하는 대학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교회가 존재하는 건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쫓아내려고 한 것이다.


대학 속 신학의 자리

사실 대학 속에 신학이 학문의 한 영역으로 인정된 것은 베를린 대학 설립 당시에 신학을 철학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어 대학의 영역에서 인정하길 거절했던 초대 총장 피히테를 상대로 쉴라이어막허가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이것은 나중에 세워지는 대학의 모델이 되어 많은 독일 대학에서 신학과를 설치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과학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학이 대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점점 작아졌다. 신학을 학문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들이 많아졌고 또 거세졌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물론이고 과학자와 사회 사상가들은 신학을 대학 밖으로 내 몰기 위해 애를 썼다. 일부 신학과는 이 즈음에 대학에서 추구하는 학문적인 이상을 거부하고 신학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 독립하여 신학전문대학(Kirchliche Hochschule)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노력과 함께 여전히 대학 안에서 실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스위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중 한 사람이다. 

바르트는 대학 속 신학과의 존재 의미를 세상 속 교회의 존재 의미와 동일하게 보았다. 곧 세상에 있는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하고 또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드러내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존재와 그 작용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과제로 부름을 받았듯이, 대학 속 신학과 역시 학문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일을 실천하면서 그것[혹은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학은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서 결단코 비합리적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신학은 신앙을 바탕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근거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르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했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세상 속 교회의 자리

관건은 세상 속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를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을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이 특별한 의심 없이 사회적인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시기에는 교회는 존재 차체만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사람들은 교회로 와서 길을 찾았으며 삶의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고 또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교회는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만 만족해야 했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있음을 환기하는 정도랄까. 삶이 힘들 때 한 번쯤 찾아와 위로를 받은 곳,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곳,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한 번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하는 곳에 불과했고, 삶의 변화는 물론이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 못되었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기능을 하는 곳들이 굳이 교회일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현실이다. 위로해줄 곳도 있고 삶의 교훈을 얻을 곳도 많다.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곳도 많다. 게다가 교회가 말하는 진리는 현대 사회에서 더는 삶의 기초로 삼거나 그것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교회는 과연 필요할까? 더군다나 교회의 가르침이 더는 세상에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믿음을 갖고 산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에 뒤지고 낡은 사고의 산물로 비난받는다면, 그래서 교회에서와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럼에도 교회는 과연 필요할까?


영화 속으로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 3>는 이런 시대 그리고 이런 질문으로 고민하는 세대들을 전제한다. 이런 난제 앞에서 교회는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영화는 교회를 특정한 상황으로 던져 놓고는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교회와 대학의 갈등 상황이며 또한 교회가 화재로 전소될 뿐 아니라 사망피해를 입은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대학 당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함으로써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은 데이빗 힐(데이빗 화이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상아탑으로서 대학의 이미지를 심하게 훼손할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입학생들이 줄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교회를 대학 밖으로 쫓아내고자 한다. 그러던 중에 교회 건물이 화재를 입고 이 사건에서 안타깝게도 목사의 동역자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대학은 이것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기회로 삼으려 한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대학[세상] 속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역자를 잃은 목사 개인의 영적인 위기로 몰아갔다. 또한 전자는 교회가 법적 투쟁을 통해 존립 근거와 터전을 얻는 것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동역자를 잃어 분노하는 목사에게 가해자는 과연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두 질문은 세상 속 교회는 진정 무엇이고,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누구인지를 발견하며 고백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교회의 존재 의미(스포일러 있음)

영화에서 캠퍼스 안에 있는 교회가 불탔다는 건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 교회는 결코 건물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건물로서 교회는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교회의 존재를 인지하고 또 각종 필요에 따라 갈 수 있는 장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실망하여 멀리하고 또 증오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의 교회가 대학 캠퍼스 내에 존재할 수 있기 위해 법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나 화재의 원인을 일으킨 범인을 증오하는 데이빗 힐 목사는 여러 갈등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건물로서 교회에 집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더는 대학과 법적 투쟁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며, 가해자를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목사의 내려놓음을 통해 대학과 교회의 갈등은 해결되었고, 방화범 혐의를 받은 학생은 용서를 받아 다시금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데이빗 힐 목사를 이런 결정으로 이끈 배경은 무엇일까? 영화는 이것을 알 수 있게 할 만한 합리적인 단서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화재로 불탄 교회에서 기도하며 얻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만 제시한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혹은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추측한다면,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일어나고 또 현실이 되는 곳임을 깨달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는 교회가 불탄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친구의 죽음도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용서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등의 중심으로 매스컴의 관심을 받았던 마을이 이후로는 화해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그의 변화가 마을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대학과 교회의 갈등, 친구를 잃은 상실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 사이의 갈등을 거치면서 그는 화재로 사망한 친구가 입버릇처럼 했던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는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함은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다스리시지만 결국 피조물에게 가장 적합한 유익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믿는 자로서 사나 죽으나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또 예수를 믿지만 교회에 가길 꺼려하는 건 어쩌면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건물로서 교회에 집착했기 때문은 아닐지 싶다.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이 중심 이유가 아닐까?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번영과 충만함과 행복과 기쁨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가 있어야 할 곳, 정의가 있어야 할 곳, 용서가 있어야 할 곳, 사랑이 있어야 할 곳, 바로 그곳이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이며, 바로 이곳에 터전을 두는 교회는 결코 건물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 그 자신이 교회가 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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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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