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챔피언>읽기-힘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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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은 국내에서 팔씨름을 소재로 만든 영화로는 최초다. 팔씨름을 스포츠로 즐기는 사람들에겐 매우 반가운 영화일 것이다. 물론 실화가 아닌 스포츠 영화가 대개 그렇지만, 팔씨름은 영화의 중심 소재일 뿐이다. 그래서 팔씨름 선수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핵심은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가족영화로서의 의미이다. 이것은 마크(마동석)가 챔피언이 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영화를 감상하면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이야기 저변에 흐르고 있는 핵심 질문 하나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향으로 감상할 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영화 <챔피언>은 힘이 어디서 비롯하며, 그 힘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마크의 힘이 어떤 역학관계에서 발생하고 또 작용하는지를 팔씨름을 매개로 전개한다.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마크는 어려서 미국으로 입양되었으나 파양되어 더는 의지할 대상이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몸으로 힘을 삼아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팔씨름이었다. 과거 미국에서 팔씨름 챔피언까지 오른 전력이 있지만 부당한 일에 연루되어 협회에서 제명당한 후에는 클럽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찌 보면 마크는 생존을 위한 욕구에서 분출되는 힘으로 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아버지가 친구에 의해 배신을 당해 모든 재산을 날린 후 가난한 삶을 전전하면서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온 진기(권율) 역시 의지할 곳이 없는 신세로는 마찬가지다. 마크를 만나 가능성을 본 진기는 자신이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트임을 자신하면서 팔씨름 선수로 마크를 복귀시키고 동시에 마크의 매니저가 되어 돈을 벌려고 한다. 진기는 돈을 벌어 인생의 그늘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위한 야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힘으로 삼아 살아간다. 그에게 마크는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는 아니라 해도 협력자일 뿐이다. 

무엇보다 돈에 욕심이 있었던 진기는 큰 자본을 운영하는 조폭 세력을 스폰서로 섭외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폰서로서 자처하며 마크가 도박게임으로 진행되는 팔씨름 대회에 참여하도록 한다. 폭력적인 사채업으로 상점의 사람들을 착취하며 살았던 그들은 마크를 챔피언으로 키우기보다는 그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욕심으로 가득 했다. 팔씨름을 스포츠로 여기며 챔피언을 꿈꾸었던 마크라도 최소한 한국에 체류할 돈이 필요했기에 진기의 주선에 마지못해 참여하지만, 후원자의 부당한 요구와 행위 때문에 관계를 청산한다. 

한편, 진기는 한국에 온 마크에게 생모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마크는 생모는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스스로를 여동생으로 소개하는 수진(한예리)과 두 조카들을 만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엄마가 남긴 E-메일을 읽은 후로 수진이 자신의 친동생이 아님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마크가 왜 이 부분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를 알만한 정보를 영화는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미국에서 겪은 입양과 파양의 경험에서 얻은 상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친 혈통이 아닌 경우에는 언제든지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지 싶다. 어쨌든 수진은 싱글 맘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중에 아이들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크의 생모의 도움을 받은 후로는 용기를 내어 살아갔다. 그녀로 하여금 살아갈 힘을 공급해주었던 건 마크의 생모에게서 받은 도움과 아이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크는 1등만 미국 팔씨름 전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국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마크는 승승장구했는데, 결승을 앞두고 갑자기 상대편 스폰서로부터 매수된 진기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결승 경기에서 상대에게 져주면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돈 때문에 살아왔던 진기에게는 그야말로 단숨에 거액의 돈을 벌 기회였고, 그래서 그는 돈에 매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크를 설득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마크는 진기의 제안을 거부하며 자신이 왜 정당하게 팔씨름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정정당당하게 시합에 임해야 하는 까닭은, 이 세상에 의지할 혈육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자신이 다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마크는 자신의 삶의 의미가 자신이 떳떳하게 경기에 임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힘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며 또한 욕망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삶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것에서 비롯함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마크에게 결승전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승전까지 오는 경기를 치르면서 손목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마크는 결승전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을까? 결승전 장면에서 영화는 마크가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의도적으로 크게 부각시킨다. 상대에게서 나오는 마지막 한 순간의 힘이면 지게 될 위기 상황에서 마크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여동생이라고 속였던 수진과 조카로만 알았던 그녀의 두 아이들이 경기장에 와서 응원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의 추억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보내고 또 약속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마지막 힘을 내어 결국 승리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하다. 사람에 따라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진정한 힘은 어디서 비롯하는지를 환기하는 것이다. 곧 진기를 포함해서 그의 주변에 있는 스폰서들 역시 돈의 힘을 믿고 살아가지만, 마크로 하여금 힘을 얻게 한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생존 욕구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시합을 통해 자신이 바르게 살아왔음을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챔피언이 되겠다고 아이들과 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더는 힘에 부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크에게 마지막 힘을 준 것은 ‘가족’이었다. 

가족의 달에 개봉하는 영화인만큼 가족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켜 제작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가족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족이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사춘기 청소년들은 아직은 가족보다는 자신과 친구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런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생각이 틀린 줄을 깨닫는다. 가족은 우리가 모든 힘을 잃었을 때조차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다. 

기독교인에게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기에 이렇게 고백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살아갈 힘을 하나님에게서 얻고 또 자신이 기대하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고백하였다. 이런 삶, 이런 고백은 시인이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은 삼손 이야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삼손은 자신이 가진 엄청난 힘의 원천은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에 있는 줄 알았다. 실제로 비밀이 폭로되어 머리카락이 잘려졌을 때 삼손은 힘을 잃고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삼손의 오해는 힘의 원천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말씀을 지켰을 때는 폭발적인 힘이 분출했지만, 그 말씀을 어겼을 때는 힘의 근원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힘의 원천에 있어서 관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시편의 기자의 고백은 바로 이런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은 나의 힘 곧 힘의 원천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의 힘이 나를 통해 나타난다 함이다.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역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내게 능력을 주시며, 그 능력에 힘입어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함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에서처럼 비록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어도 오직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할 수 있는 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힘의 근원으로 삼으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가족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족 해체는 가족이 갖는 의미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결코 될 수 없음을 환기한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기독교인은 힘의 근원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있음을 명심하면 좋겠다. 가족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가족을 힘들게 할 뿐이다. 사랑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해야 할 가족의 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부담으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돕기 위해 존재하고 이것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데에서 분출됨을 기억하자.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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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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