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코코>읽기 - 죽은 자들을 기억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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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들의 날

<코코>는 디즈니&픽사가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제75회 아카데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로 멕시코의 문화적인 배경에 담아 제작되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죽은 자들의 날(El Día de los Muertos)’은 멕시코의 토착 종교문화가 가톨릭에 의해 수용되면서 형성된 전통 축제이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이날은 죽은 자들이 일 년에 한 번(11월 1일~2일) 이승의 가족과 친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날이다. 살아 있는 자는 고인의 사진을 걸어놓고(기억을 상징) 그 앞에 촛불과 향을 피우는데(죽은 자들을 환대한다는 의미로), 상 위에는 망자가 평소에 좋아했던 음식들을 차려 놓는다(산자와 죽은 자의 음식 공동체). 감각을 자극하는 음식을 사용하는 건 죽은 자가 사실은 영혼의 형태로 살아 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음식 냄새가 짙게 풍기도록 따뜻하게 차리는데, 냄새가 사라지면 죽은 자들이 식사를 끝냈다고 여긴다. 죽은 자들이 사후 세계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집 입구에서부터 제사상에 이르는 꽃길을 만들어 놓는다. ‘죽은 자들의 날’에서 관건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고인을 기억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점을 착안하여 만들었다.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은 한국의 제사 문화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하지만, 그 정신은 다르다. 예컨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음식을 매개로 공동체를 표현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제사를 드리는 일은 고인의 음덕(음식이 있게 해준 은혜)을 기리면서 또한 음덕(음식이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손의 번영)을 기대하는 행위임에 비해,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은 다만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며 추모하고 또 산자와 죽은 자가 서로 만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확인하는 날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이런 점에서 다분히 기독교적이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해도 사후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개신교와 많이 달라 낯설고 거부감이 앞서지만, 사후에 영혼이 머무는 연옥의 세계를 믿는 가톨릭의 입장에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멕시코 전통 문화와 가톨릭의 세계관이 결합되어 형성된 축제라 보면 될 것이다.

영화적인 측면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사후세계를 매우 밝게 표현한 것이다. 무엇보다 비슷한 사후 세계를 표현하는 <유령신부>(팀 버튼, 2005)나 <신과 함께>(김용화, 2017)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죽음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멕시코인의 낙관적인 생각을 보여주는데, 이런 낙관적인 세계관을 영화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을 해골의 형태로 표현한 것은 전통 축제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사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는 유골에 천착하여 형성된 이미지라 생각한다. 아마도 흙으로 돌아가기 전 유골로 남아 있는 기간을 염두에 둔 것일 텐데, 죽은 자는 적어도 이 기간까지는 산 자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 내용에서 특징적인 점은 우선 음악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음악은 성공과 출세를 위한 기회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기억이며 또한 기억을 소환하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두 개의 특징은 다분히 가톨릭 전통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는 산자들의 기억에 따라 죽은 자들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연출된 것이다. 산자가 기억하고 있는 만큼 죽은 자들이 사후 세계에서 존재하게 되며, 산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가 지속되고,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죽은 자의 존재 역시 사라진다. 더 이상 산자와의 관계를 갖지 못하며 무(無 nothing)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승의 종말이 생명이 끝나는 죽음이라면, 사후 세계의 종말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에 의해 기억되지 않는 순간이다. 이것은 연옥에 있는 존재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믿는 가톨릭 종말론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은 자가 베푸는 축복이 살아 있는 자(미구엘)의 소원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영화 <코코>는 멕시코의 전통축제를 배경으로 그리고 가톨릭교회 전통을 매개로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을 형상화하면서, 기억은 기억되는 것을 존재하도록 하고 기억하지 않는 것은 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그것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화두를 제시한다.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왜 죽은 자를 기억해야 하는가?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왜 죽은 자를 기억해야 할까?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엄습하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으나, 사실 고통이 심하면 두려움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의식이 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으로 엄습해 오는 것은 자신이 사람들에 의해 잊히는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대개의 경우엔 기억에 대한 기대가 크게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가 기억되지 않는 사실을-비록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비존재 혹은 무(無 nothing)로 형상화한 것은 매우 적합하다. 그리고 기억을 통해 산자와 죽은 자가 서로 교통하고 또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 역시 매우 의미 있는 표현이다.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기억은 현실에서 부재하는 것을 존재케 할 뿐 아니라 지속하게 하는 힘이며, 비록 현실에서 부재하는 것이라 해도 사람은 기억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을 반복적으로 행하라고 하셨고, 또한 이로써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라 하셨다. 물론 이것은 부활에 대한 기억을 포함한다.
한편, 추도 예배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죽은 자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죽은 자의 음덕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또 계속적인 음덕을 베풀어주기를 기대하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산자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죽은 자를 기억하면서 예배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든다. 굳이 기독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통 문화와 관습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한 것에 불과할까? 아니면 그 자체로 기독교적인 의미가 있는 걸까?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의 의미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예수님만이 마지막 만찬과 관련해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 곧 죽은 자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는 죽은 자들이 살아있을 때의 행적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교훈과 깨달음을 주기 위함이다. 죽은 자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로써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행하실지를 깨닫게 한다. 그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죽은 자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죽음이 모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환기하는 것이고 또한 믿고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반드시 부활할 것임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부활은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하지만, 죽은 자에게 부활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한 자는 더는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또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으니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은 자를 교회적으로 기억하는 기회를 갖는 일은 공동체에게뿐 아니라 성도로서 죽은 자의 가족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믿음 안에서 죽은 자를 기억하는 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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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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