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원더> 읽기 - 기적을 기대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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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의미

인간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보이는 세계 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관계를 생각해왔다. 때로는 부정했고, 때로는 동경했다. 함께 있던 사람이 죽음과 더불어 더는 함께 있지 않음에도 꿈속에서 나타날 때 혹은 그리움의 정서가 일어날 때, 혹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과 관련해서 불가사의하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다른 세계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해하려 했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기제들을 만들어 실천했다. 그리고 만일 보이지 않는 존재,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 어떤 형상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 성경이 증거 하는 이런 의미의 신적인 존재가 만일 어떤 작용을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생각했다. 불가사의한 일로서 그 작용이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한 것이라 믿어지면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다. 기적은 자연법칙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말하지만, 그것의 기독교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인지할 때 지각능력과 인식의 틀을 사용한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지각할 수 있고 또 인지할 수 있는 것만 알아볼 수 있다. 지각할 수 없다고 해서 혹은 인지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사건과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인간의 뇌는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에 매여 있는 것이다. 지각할 수 있고 또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고, 만일 원인이 없다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관찰할 방법이나 설명할 방식을 찾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만일 관찰 가능한 현상이라도 아직 원인-결과 관계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흔히 불가사의라 말한다. 그들에게는 모든 일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에 만일 현상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 쉽게 납득되지 않은 일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일어났다고 여겨지면, 곧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여겨진다면, 과학자들은 일단 그것을 명명하기를 유보하지만, 종교인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한다. 불가사의한 일은 인과론적으로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지만, 기적은 그것이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신이 항상 불가사의하고 또 기적이라 여겨지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자연 현상들이나 사회 현상들 그리고 일상의 모든 일들도 신적인 작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현상들은 그야말로 일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또 쉽게 간과된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들을 모두 기록한다면, 그것을 보관할 곳이 부족할 정도이다. 이것은 성경이 수많은 일들 중에 선별적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 중에 기적과 이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기적은 결코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건과 현상들이 있었지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따라서 신적인 작용과 관련해서 언급되는 일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선별된 것들이며 대체로 불가사의한 일이나 기적이다. 기적을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을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이라 해서 무시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해도 일어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기적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일이나 혹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종교적으로 널리 알려진 현상이며, 과학과 달리 종교의 특징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러니까 과학은 현상들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알려지는데 비해 종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거나 혹은 믿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과학 이전 혹은 과학을 넘어서는 현상은 오래전부터 종교의 고유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와 과학은 기적과 관련한 많은 점에서 갈등했고 또 갈등 양상을 바꿔가며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

성경은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일에 대한 기록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구약에는 창조부터 시작해서, 해가 멈춘(지구가 자전을 멈춘) 일, 홍해의 기적, 불치병이 치료받은 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일 등이 있고. 신약 역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였음을 증거 한다. 예컨대 물 위를 걸었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을 가지고 5000명 이상을 먹이셨다. 눈먼 자를 보게 할 뿐 아니라 중풍병자를 낫게 했고 또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

성경 저자들이 이런 기적들을 이야기 형태로 전해주는 이유는 유대교에서 나온 후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일어났고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새로운 세상의 회복에는 자연환경의 회복과 인간다움의 회복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고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세상에는 부자들의 독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리는 일이 없고 또한 병 때문에 인간다운 삶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나도록 하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또 자신들에게 일어나길 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굶주리는 자가 결코 없어야 하며 또한 병 때문에 인간다움이 무시당하는 일이 있어서도 결단코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적은 무엇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 일(역사)에 개입하시어 나타난 결과를 말한다. 관건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역에 따른 결과임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초월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근대 이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자연법칙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직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혹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것에 대한 경험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기적을 대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가 아니라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기이하게 경험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성경기자들이 놀라운 일들과 그것들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들을 공동체에 전해주면서 의도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들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본질을 계시하면서까지 인간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성경기자들은 기적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심을 인지하고 또한 하나님의 긍휼(사랑)과 권능 그리고 영광을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길 원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행한 기적은 먼저는 예수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자임을 나타내 보이고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뜻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하나님이 참 하나님 됨을 세상 가운데 나타낸다. 따라서 성경의 기적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징표이며, 또한 예수를 통한 구원을 미리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사도들의 기적은 예수 이후의 시대를 사는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들이다. 이것은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재하는 시대에 예수의 인격과 사역이 계속 될 것인가에 관해 의문을 품었던 당시 사람들을 향한 징표였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이름은 존재를 상징한다) 행하는 모든 일들은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 행했던 일들과 동일한 목적과 권능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사역은 예수 사역의 연장이며, 사도행전의 기적은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증거 한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더 이상 세상 가운데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재하는 시기에 사도들을 통해 그리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의 인격과 사역이 계속 나타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하는 이유는 예수 이후의 시기에는 오직 성령만이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이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나타나도록 하신다.

따라서 기적을 이해하는 관건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를 밝히는 데에 있기보다 오히려 어떤 일이든 우리에게 사랑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길 원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는 데에 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기적의 의미는?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질문을 생각해보자. 오늘날에도 기적은 일어날까? 오늘 우리 역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나타났다면, 같은 목적과 필요성이 있으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기적은 일어날까?

우리가 사는 시대와 성경 시대를 비교한다면,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불가능한 일에 대해선 신화 혹은 상상력의 산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방법을 중시하고 또 과학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현대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곧잘 일어난다. 이것을 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현대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성경적인 의미의 기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의미의 기적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말하는 징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적에는 하나님의 긍휼, 사랑, 권능, 영광 등이 분명하게 표출된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신학적인 의미의 기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해서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되면 Deus ex machina 논리라는 비난에서 면치 못한다.

앞서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오늘날에도 기적은 일어날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통해 일하셨듯이, 오늘날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우리에게 행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만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당신의 긍휼하심을 보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입증해보이시며, 또한 우리를 통해 세상에 권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 기적은 하나님이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일이며, 또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혹은 세상을 놀라게 하여 당신을 주목하게 할 목적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과거와 방식과 양태에서 다르다 해도 기적은 지금도 일어난다.

기적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물론 개인적으론 이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이것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다) 인격과 삶의 변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시대에 자신을 내려놓고 은혜로 인하여 새로운 모습을 입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일이며, 이 일이 일어난다면, 어렵게 볼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에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삼는 일 역시도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현실을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적을 기대하며 살자

이런 관점에서 영화 <원더>는 우리 시대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로 보아도 좋겠다. 영화는 2012년 미국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R. J. 팔라시오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해 “아름다운 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주일학교 학생들로 책을 읽도록 하거나 영화를 함께 관람하길 추천한다.

감독은 기적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어기의 능력보다는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안면기형인 어기가 오랜 동안의 침묵 끝에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편견으로 가득한 따가운 시선과 심한 따돌림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잘 인내해주어 결과적으로 그를 대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변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일은 기적의 주인공인 어기의 역할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기가 일으킨 기적이라는 건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다만 편견으로 가득한 시선과 심한 따돌림을 참으면서 그들과 친구로서 지내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이런 점에서 어기의 누나 비아의 베프인 아만다가 자신의 가족 상황 때문에 스스로 비아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은 어기와 대조적으로 조명된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주눅들 수밖에 없고 따돌림으로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비아의 친구 아만다는 그런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기는 베스트프렌드를 사귀기까지 인내하였고, 인내하며 지내는 동안 친구들의 시선은 바뀌기 시작했다. 시선의 변화는 생각과 마음의 변화로 이어지고, 결국 태도의 변화와 더불어 관계의 변화까지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인은 어기만이 아니라 어기를 대하는 일부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어른의 부탁에서 비롯하든 아니면 교장 선생님의 부탁에 따른 것이든 소수의 친구들은 어기의 편에 서있음으로써 어기가 끝까지 인내하는 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영화는 중요한 건 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며, 따뜻한 마음으로 약한 자를 대할 때 오히려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을 기꺼이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사람이 편견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선하게 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심한 안면 기형의 아이가 학교에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며, 끝까지 인내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주변의 아이들을 베프로 만들뿐 아니라 또한 안면기형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도록 해주었다면 기적이 아니고 또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로 고통 중에 있을 때 말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하는 건(물론 충분히 혼자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세울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를 경험할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자신의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알림으로써 사람들의 편견과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돌보고 또 기도함으로써 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을 인내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며,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을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기적은 일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분별하여 볼 수 있을 때 일어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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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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