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1급기밀> 읽기 - 식구와 공범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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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의 사전적인 의미에 따르면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혈연 공동체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가족’ 개념이 다양해지고 또 비혈연 관계의 가족이 늘어나는 상황에 비추어볼 때 식사공동체로서 보통의 가족을 염두에 두면 되겠다. 영화 <가족의 탄생>(김태용, 2006)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구성한다는 이야기인데, 마지막 식사 장면을 통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식구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가족을 표현할 때마다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이 등장하는 건 함께 먹는다는 의미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다. 가족은 식구이며, 식구는 가족이다. 

그렇다고 식구가 항상 가족을 전제하는 건 아니다. 서로 다른 가족 구성원이라도 목적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한 식구가 됐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계약관계만으로는 그 깊고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수 없을 때 종종 사용된다. 이를 위해 가장 흔하게 행하는 의식은 밥을 같이 먹음으로써 밥상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친밀감을 넘어 계약관계의 확인 혹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음을 서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여기에 서로 피를 나누는 의식을 더한다면 피를 나눈 혈연관계를 염두에 두는 상징행위이다. 그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표현한다. 운명공동체로까지 의미의 확장이 이뤄진다. 경우에 따라선 만일 관계가 누군가에 의해 깨졌을 경우에는 피로 응징한다는 위협적인 의미도 함의한다. 

식구에게는 식구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며, 또한 식구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갖는다. 누군가의 식구가 된다는 것은 식구가 보장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다 함이며 또한 이를 위해 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고, 생존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의미이다. 권리만 누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 비록 식사 자리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해도 눈칫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눈칫밥이란 표현에는 가족에게는 어느 정도 요구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하튼 생존의 문제가 걸린 문제이니 모든 식구 구성원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서로 힘을 합쳐 맞서 싸워야 할 의무가 형성된다. 요즘 같이 각자도생의 시기엔 가족이라도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말이 가족이고 또 식구일 뿐 밥상 공동체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오히려 회사나 학교에서 식사공동체를 더 실감나게 경험한다. 비록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한다 해도 <좋지 아니한가>(정윤철, 2007)에서 볼 수 있듯이 유사시엔 함께 힘을 모아 대처하는 것이 식구이고 또 가족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은 구성원이 아무리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 해도 개인의 안전을 위한 마지막 보루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도 아니고 식구도 아님에도 식구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가족이나 식구에게 있는 다양한 이미지 중에 좋은 것만을 차용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거 산업발전 시기에 회사에서 사용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이미지다. 회사는 사원들에게 ‘우리는 한 가족’ 의식을 갖도록 노력했고, 실제로 회사는 사원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족을 초청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회사가 고용하고 월급을 주면서 가족의 생계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니 한 가족이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했다. 회사는 말 그대로 가족의 생계를 함께 책임지는 가족이었다. 회사가 잘 돼야 가정이 아무 염려 없이 지낼 수 있고, 회사 운영이 힘들어지면 가족 역시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회사와 가족은 운명을 함께 하는 운명공동체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IMF 경제 위기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허위였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회사는 스스로를 가족이라 여긴 사원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그럴 의도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왜냐하면 임원들은 각종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상황에서도 사원들은 구조조정의 날카로운 칼날을 두려워 떨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같이 밥을 먹는 식구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함께 식사하길 거절했다.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퇴직하여 거리로 내몰렸고, 가족은 해체될 위기에 봉착했고, 실제로 많은 가족은 해체되기도 했다. 회사가 더는 가족이 아니었고, 사원들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표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가족 이미지를 차용하여 사원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허위의식을 심어주는 매개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가족이데올로기에 기만당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회사가 강조한 식구나 가족은 이미지였을 뿐이며, 그 이미지로 사람들을 세뇌시켜 사람들이 회사를 위해 최고의 성과를 올려줄 것을 기대하여 내 건 전략에 불과했다. 그것은 노동력 착취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식구 혹은 가족은 공범 의식을 조장하는 덫이기도 하다. 범죄단체에 속한 사람은 식구 혹은 가족이란 의식이 자긴 안에서 내면화되기까지 각종 선의와 호의를 받으면서 공범 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식구라는 의식이 주입되고 또 가족이 누리는 각종 혜택을 함께 누리면서 형성된 공범의식은 비록 불의를 목격하고 비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같은 식구로서 은폐하고 감싸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식구 의식을 주입하는 일은 상대가 내부고발자로 변절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일 뿐이다. 가족으로서 누리는 온갖 특혜는 공범 의식을 조장하는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강제로 주입되거나 반복되는 호의와 선의를 경험함으로써 내면화된 ‘식구 의식’은 일종의 폭력이다. 식구라는 말로 상대를 교묘하게 기만할 뿐 아니라 비리를 폭로하려는 상대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식구라는 말과 식구 의식은 일종의 정신적인 폭력으로 작용하여 내부의 불의와 비리를 결코 발설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을 염려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내와 자녀들을 위협하여 삶 자체를 힘들게 함으로써 내부고발에 대한 죄의식을 갖도록 조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식구는 폭력을 넘어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다. 

서두가 길어졌지만, 서두이자 본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왜냐하면 <일급비밀>은 방산비리와 관련해서 바로 이런 폭력의 역학관계가 ‘식구’라는 허위의식을 통해 어떻게 작용했으며, 또 그에 맞서 싸운 몇 사람들의 힘겨운 투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실제 가족들이 견뎌내야 할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박대익(김상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방산비리와 관련한 일급비밀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 또 그것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실화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했다. ‘식구’를 폭력의 도구로 이용했던 방산비리 관련자 집단은 범죄집단과 다르지 않음으로 폭로한다. 간단히 말해서 ‘식구’는 폭력을 폭력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허위의식이며 또한 각종 불의와 비리에 대한 공범의식을 심어주는 마약이었다. 종교적으로 그것은 사탄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고발적인 영화로서 <일급기밀>이 식구라는 허위의식을 폭로하였다면, 가족 영화로서 <일급기밀>은 가족의 진정한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환기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박대익 가족은 한편으로는 비록 오해였다고 해도 남편이며 아버지로서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식구라고 해서 당연히 불의를 눈감아주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가족에게는 죄를 숨겨준다고 해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시 여기는 건 옳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 외로운 투쟁의 길에 오르는 남편과 아버지와 끝까지 함께 하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방산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식구라는 허위의식과 상반된 장면이 있는 것은 영화가 ‘식구’에 내포된 상반된 의미를 부각할 목적에 따라 연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1997년, 2002년, 그리고 2007년에 있었던 방산비리 폭로 사건들을 재구성하여 만들었다. 실화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실화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를 판단하는 몫은 오직 관객에게 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뿌리까지 뽑지 못해 방산비리는 박근혜 정부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또한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적대행위’라는 말이 사용될 정도로 매우 강하게 비판된 적폐이지만, 군 내부자의 고발로 엄청난 혈세 낭비를 막은 사건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영화는 MB 시기에 크랭크 인을 하여 겨우 완성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홍기선 감독은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 했다. <1급기밀>은 그의 유작으로 개봉되었는데, 상영관을 얻기 힘들 정도로 강한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실미도>(강우석, 2003)나 <이태원 살인 사건>(홍기선, 2009) 혹은 <도가니>(황동혁, 2011)처럼 여론을 움직여 사건에 대한 재조사와 그에 따른 처벌을 촉발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그것을 간절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스포일러 있음)

방산비리 주동자들은 야전에서 육군본부로 새로 전입한 박대익 중령을 새로운 식구로 열렬하게 환대해주었고, 박 중령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들과 한 식구로 의식하도록 과분한 호의와 선의를 베풀어 주었다. 대령 진급을 보장해주고, 심지어 장군까지 진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가족의 통장으로 정기적으로 돈을 입금하였고, 온갖 상품권으로 선물공세를 퍼 부었다. 박 중령 개인의 신분으로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어 자기 자신에 대한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들 사회에서 식구로서 의식은 군인으로서 신분보다 우선했으며, 그래서 식구를 위해 방산 불의에 눈감고 비리를 은폐하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대익은 전투기에 사용되는 불량부품과 관련한 일련의 방산 비리 때문에 조종사들이 죽어나갈 뿐 아니라 자신들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전투기 고장이 아니라 조종사들의 과실로 몰아가는 군 관계자들의 부당한 일처리를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박대익은 최소한 조종사의 명예를 위해 사고의 원인을 알아보는 중에 전투기 부품 구입과 관련해서 부품 값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고, 낡은 부품으로 돌려 막으면서도 새 부품으로 대체했다는 식으로 보고되는 현실을 확인한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비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서의 직원들 아니 식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오히려 문제 삼는 박대익에게 한 솥밥을 먹는 식구로서 자신들을 도둑놈으로 몰아세운다며 배신자로 낙인을 찍는다. 게다가 엄청난 규모의 차세대 전투기 구입을 추진하려고 한다. 박대익은 그동안의 비리를 폭로할 뿐 아니라 엄청난 혈세를 낭비하는 차세대 전투기 구입을 막기 위해 방송 인터뷰를 자처한다. 영화는 방송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벌어진 갈등 상황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준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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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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