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미국 복음주의자가 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사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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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는 대사관 이전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 해석, 인용 구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텔 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옮기려는 의도를 트럼프 대통령의 복음주의적 기반에서 반길 수도 있다. 81%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그를 지지하며, 2016년 선거 당시 공약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기간에 대사관 이전은 공약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고,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이후 첫 번째 조치로 이행할 것을 약속했을 때,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되는 논제였다. 현재 필자(Gary M. Burge)를 포함해서 여러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여러 보도를 보게 되면 복음주의자들이 이번 사태를 한 가지 시각으로만 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현대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신학 이론을 대입시키는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이 있기는 하다. 마치 성경의 이야기가 성경에서 생생히 살아나는 것이다. 기독교 구약인 히브리 성경에서, 기원전 천 년 전에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지정했다. 여러 전쟁과 바벨론 유배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유대인의 머릿속에는 이스라엘의 사실상 수도로 남아있다. 신약 시대에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여긴다. 그러나 서기 70년에 있었던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잃었다. 현대 이스라엘은 1967년이 되어서야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이 시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는 보주주의 복음주의자들이 고대 성경의 이스라엘을 현대 세속의 이스라엘 국가와 연결 짓는 것이다. 거의 4천 년 전에 맺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현대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신 창세기 17장 8절 말씀이 그것이다. 이런 복음주의적인 해석은 이 구절이 단순히 고대의 것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권리를 주는 정치적 특혜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족속을 보호하겠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장 3절)라는 구절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명령이 될 수 있다. 현대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독자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런 복음주의적인 시각은 부분적으로 성경과 이스라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신뢰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경우, 유대교에 지나치게 사로잡힐 수 있다.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특별한 장소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으로서 경의적인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믿게 된다. 이스라엘을 전체 세계에서 따로 떼어 보는 예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루살렘 탈환이 중요한 이유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예언의 성취로 보는 복음주의자들도 있다. 그러나 보통의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는 종종 구분하기 어려운 여러 언약의 실타래로 여긴다.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원한다면, 여기처럼 예루살렘을 원한다면, 마음껏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이런 지위의 정당성은 대체적으로 고대에서 21세기까지의 신학적 움직임에 따른다. 신학적인 연계가 이루어진다면, 현대 세속적 이스라엘은 어느 국가도 가질 수 없는 성경적 언약과 특혜를 받게 된다. 국제사회의 비난과는 상관없이 예수살렘의 전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연계가 근본적으로 건전하지 않다는 데 있다. 대부분 복음주의자들이 적법치 않다고 여기는 현대 정치적 목적으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필자 같은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와 공화당 정치권 사이에 최근 일고 있는 훈훈한 분위기를 반기지 않고, 미국 대사관을 옮기는 것도 우려하고 있다. 중재와 정의의 추구는 가치 기대치가 높은 것들이다.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을 기본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 속 이스라엘인들은 도덕적 가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히브리 예언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되고 성지에서 추방을 면할 수 없다. 아모스서 5장 23~24절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의 말씀처럼 아무리 예루살렘에 관련한 일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현대 이스라엘을 보게 되면 아모스 구절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나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날의 현대 이스라엘을 연결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모스 구절의 의미를 텔 아비브에서는 성경적 견지에 기초한 도시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라도 막아야 한다. 성경은 소위 ‘영역문제(territorialism)’를 크게 보지는 않는다. 이를 신약의 땅 이름에 기초한 언약이 아니라, 복음에 중점을 둔다. 이스라엘에 관한 종족이나 지역적 신학은 세계적이고 일반적으로 보는 것으로, 모든 종족과 모든 땅의 모든 사람들을 신성한 축복의 언약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절을 통하여 인종적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고 있다. 이것으로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어떤 한 민족의 배타성을 문제시하고 축복을 일반화하는 이런 변화가 강조되는 것은, 고대 교회의 세계선교와 예수님이 하신 유대인 구세주 사역에 이방인을 포함시킨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되면, 예루살렘을 두고 있는 이런 논쟁, 종족적 영토 주장은 이질적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이 성경 역사상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고대의 시각은 오늘날처럼 ‘수도’로 보는 견해와 달랐다. 이스라엘 같은 종족 사회에는 일반적으로 궁과 사원을 제공하는 하나의 거대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를 주변으로 삶이 흘러갔고 이곳의 패배는 그 국가 자체의 패배였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현대의 텔 아비브는, 모든 대사관들이 있는 곳으로, 성경 시대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현재 오십 만개의 도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아마도 정서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또한 팔레스타인의 삶에 있어서 종교적이고 정서적인 수도이다. 예루살렘 동쪽은 무슬림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의 고향이다. 기능적 수도는 라말라이지만, 교회와 회교 사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예루살렘이다. 이슬람에서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 다음으로 세 번째로 성스러운 도시이다. 역사적인 알 아크사(Al-aqsa) 회교 사원뿐만 아니라 7세기 바위 돔(Dome fo the Rock) 사원이 있다. 팔레스타인 무슬림은 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 주장에 굉장히 방어적이어서 이런 대사관 이전을 예루살렘 전반의 일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는 조치로 본다. 문제가 된다는 말 정도가 아니라, ‘선전포고’로 보는 팔레스타인도 있다.

미국 대사관을 텔 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는 것은 도발 그 자체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화적인 조치로 자극을 피해야 하는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대사관들이 예루살렘의 일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이는 반이스라엘의 적대감에 나온 것이 아니다. 평화적인 처리를 추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특권을 존중하는 공유된 도시로 예루살렘을 보는 실리적인 결정인 것이다.

국무부의 직업 외교관이 사적인 자리에서 대사관 이전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불행히도, 많은 베테랑 외교관들이 사직서를 내거나, 쫓겨나고 있다. 이들이 중동에서, 상징적인 행동으로도 매우 실제적이고,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백악관에 상기시켜 주었으면 한다. 복음주의자들도 이 일을 같이 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복음주의 고문관의 말은 귀 기울여 듣는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반대편 히브리 예언자들과 협상하게 할 수 있다. 

개리 M. 버지(Gary M. Burge)는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 성서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현재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치고 있다.

 

원문은 https://www.theatlantic.com/world/에 게시된 "You Can Be an Evangelical and Reject Trump's Jerusalem Decision"를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비영리 목적으로 번역, 편집해 한국교회에 소개한다. 저작권은 THEATLANTIC.COM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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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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