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군함도> 읽기 -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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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성적만큼 논쟁도 뜨거운 영화 <군함도>

류승완 감독의 작품 <군함도>를 두고 논쟁이 뜨겁다. 한편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결코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비극적인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룬 영화치고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군함도(하시마 섬인데, 생긴 모양이 마치 군함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에 얽힌 이야기의 실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영화의 외연을 중국으로까지 넓힐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대한민국에 국한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영화에 기독교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주 무대가 교회라고 해서 기독교 영화가 아니듯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삶을 다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항일의식을 고취시킬 목적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감독의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감독예술로 불린다. 잘 알려진 이야기라도 그것을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의 결정은 감독의 몫이다. 평가는 작품을 두고 하는 것이지 관객의 기대를 갖고 하는 건 아니다.

또한 영화는 일정한 주제에 따라 이야기를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그대로 재현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영화의 현실성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나 그렇다고 상상력을 억제하거나 배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이야기라도 다만 관객이 보고 느낄 수 있었다면 영화적으로는 일단 성공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흥행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흥행은 관객을 동원해야하기 때문에 흥행하는 영화이기 위해선 영화적인 완성도를 넘어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상업영화는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다수의 이미지들을 영화에 반영한다. 이런 이미지들을 관객이미지라 한다. 관객이미지를 구현하면서도 감독은 자신의 영화철학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또한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충실하게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영화의 흥행에 결정적인 요인인 관객의 호응과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을 경우 감독은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군함도>를 두고 일어나는 논란의 핵심은 관객이미지와 감독예술로서 감독의 선택 사이에 놓여 있다. 사실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통해 처음으로 공영방송에 소개되고 난 후에 <군함도>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일제의 강제징용과 그것에 의해 조선인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를 보고 싶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역사가들의 설명도 뒤이어졌기에 <군함도>에 대한 기대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 이상이었다. 많은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한 것들은 애국주의적인 정서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영화는 탈출에 방점을 두었고, 오히려 조선인들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에 집중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탈출을 위해서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건 메시지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단서다. 일말의 반일감정을 충족시킬 요량으로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이나 최소한 군함도에서 벌어진 일본인들이 만행을 확인할 것을 기대한 사람들은 오히려 당시 조선인들을 포함한 자신의 치부가 폭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 크게 실망할 뿐이다. 물론 당시 일제의 만행이 영화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조선인들이 서로를 적으로 대하며 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족을 짓밟는 생존경쟁의 논리가 훨씬 지배적이었고, 또 그것에 의해 묻혔다.

영화를 본 역사가들에 따르면, 군함도와 탄광에 대한 고증도 훌륭하고, 강제징용으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의 장면이나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착취와 학대도 어느 정도 사실적인 묘사에 가깝다고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흐름은 픽션으로 일관되어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요점은 <군함도>의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관객이 기대하는 것에서 한참 벗어났다는 것이다.


<군함도>가 말하고자 한 것

관객의 기대와 달리 <군함도>는 자유를 향한 탈출에 관한 이야기다. 애굽 사람들에 의해 압제와 학대 그리고 착취를 당한 히브리 민족의 엑소더스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자유를 찾아 지옥 같은 섬으로부터 탈출하는 조선인의 탈출기다. 석탄을 배로 옮기는 철제도구를 다리로 삼아 탈출하려다가 끊어지자 사람들이 일장기를 찢어서 그것을 다시 세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장면은 매우 깊은 인상을 주는데, 이 때 광활한 바다를 보도록 한 건 새로운 세상을 향한 탈출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연출이다. 비록 조선이 힘이 없고 또 사분오열되어 온갖 수모와 질고를 겪었다 해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일본을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함도는 실패한 영화인가? <군함도>로부터 관객이 기대한 이미지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애초부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일제 강점기와 군함도는 단순한 소재일 뿐, 그가 원래 의도한 것은 억압의 현실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욕망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관객이미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영화 이야기를 따라 가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영화에는 다양한 캐릭터의 군상들이 등장한다. 독립을 위해 훈련된 캐릭터를 연상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타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자(일본)가 있다면, 그들에게 빌붙어 생존을 보장받으며 악역을 자처하는 자(노무계원들)가 있고, 그들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고 생존할 뿐 아니라 치부하려는 자(윤학철)가 있으며, 오직 생존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하는 자(이강옥)도 있다. 생존을 위해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강제로 징용되어 끌려온 사람들)도 있고, 탈출의 기회만을 엿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을 문명국으로 여기며 끝까지 대화의 상대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반해 확고한 신념과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일제의 만행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남겨놓은 상처들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감독은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폭로한다. 다시 말해서 누가 통치하든 상관없이 나타나는 인간의 욕망을 보도록 했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조선 종자인간 종자로 바꾸어 들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영화를 이렇게 본다면, 군함도와 이곳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단지 소품일 뿐이며 또한 캐릭터로서만 의미가 있는 존재이고 인간 군상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다.

 

'소희'의 시선과 우리의 대답

이런 점에서 <군함도>는 역사적인 사건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하는 영화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군함도>는 생존을 염려하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군함도는 작게는 조선반도요, 크게는 지구촌의 축소판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염려하며 살아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일 관객이 영화를 제대로 보길 원한다면, 관객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생존 문제 앞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고 또 어떤 파열음을 내는지를 염두에 두고 감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영화를 두고 전개되는 논란에서 벗어나 영화를 영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 곧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안고 관객을 향해(카메라 시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소희는 바다 넘어 일본 본토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핵우산을 보고 있다) 몸을 돌리며 슬픔을 가득 안고 관객을 바라보는 소희의 시선은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것 같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삶의 경쟁에서 우리는 영화 속 어떤 위치에 서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권력자에 빌붙어 살 것인지, 혼란의 와중에 한몫 얻으려 할 것인지, 그저 생존만을 염두에 두고 권력에 복종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으려 저항하며 살 것인지.

이제 처음의 논란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영화가 군함도란 이름으로 만들어졌음에도 관객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군함도에서 일어난 실상을 충분히 조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부각하는 성격의 영화는 군함도의 실상이 먼저 공개된 후에 제작되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생존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서 필자는 인간이 죄 가운데 머물면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죄의 현실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기울이는 어떠한 노력도 결국은 타인을 밟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본능적이라도 그것 자체가 일종의 절규로 들린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니 그리스도인조차도 예외가 아닌 현실에서 누가 우리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여 구원해줄 것인가? 애굽에 억눌려 있던 히브리 민족의 부르짖음에 대해 하나님이 반응하시어 구원하셨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야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어떻게든 그들의 부르짖음에 반응해야 할 것이다


최성수 박사가 본 <군함도>는?   

기독교적 가치 (4.0)          작품성 (4.0)       대중성 (4.5)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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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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