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오두막> 보기 : 삶의 변화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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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고 또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건 무엇일까? 비록 온전하지는 않아도 첨단 기술 기반의 매체는 어느 정도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보이지 않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또 그것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통해 증거 할 수 있을까? 이런 기능 역시 매체가 어느 정도 수행한다. 모든 종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머물러 있는 존재나 혹은 그 세계가 갖고 있는 힘을 통해 각종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종교(religion)라는 말 자체가 두 세계를 연결시켜준다는 의미를 갖는다. 각 종교에 있는 교리체계는 바로 두 세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과거에 종교 혹은 종교적인 인물이 수행했던 일들을 오늘날에는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매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영화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시청각 매체를 통해 지각 가능하게 하고, 비록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것의 존재와 작용을 증거 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가 수행하는 두 세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영화는 어렵지 않게 수행한다. 깨달음과 울림은 물론이고 공감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서투른 종교의식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이와 관련해서 기독교는 계시를 말해 왔는데, 계시에 대한 믿음과 증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와의 관계를 말해 왔다. 히브리서 111절에 따르면,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증거 하는 것이며, 또한 약속에 근거하여 소망하는 것들이 결코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증거 한다고 말한다. 계시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결코 성립되지도 않고 또 이해될 수 없다. 계시는 기독교 신앙의 존재 근거이며 또한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또 그것을 기대하게 한다. 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지각할 수 없는 계시가 있지만, 그것을 말할 수 있고 또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각 가능한 것을 매개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를 말할 수 없고, 또 그것의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


기독교가 계시 종교라 함은 하나님이 지각 가능한 방식으로 세상 가운데 나타나실 뿐 아니라, 인간은 그런 계시에 근거하여 반응하여 종교의식을 거행하며 또 삶을 구성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 하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정경으로 채택된 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또한 그분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성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며 또한 삶을 구성한다. 무엇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 경험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학적인 성찰을 매개로 판단한다.


무엇을 경험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적인 하나님 경험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다른 경험들로부터 구분하게 만드는 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성경적인 증거와 정합적으로 일치해야 할 것이며, 또한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될 수 있어야 하리라. 설령 기존의 신학적인 성찰로 다 헤아리지 못하는 새로운 현상이라 해도 최소한 기독교 신학적인 전망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2.

서두가 길어졌다. <오두막>2007년에 출간된 윌리엄 폴 영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소설과 내용은 몇 가지 점이 각색된 것을 제외하면 충실하게 재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오두막은 문학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기독교 문학이다. 교리적인 틀에 매여 상상력에 스스로 족쇄를 채워야 하는 기독교 문화 현실에서 볼 때 매우 용기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심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삼위일체 신앙을 통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소설의 소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부터가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삼위일체 신학은 주로 교리적인 판단을 위해서만 사용되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사역을 말하면서(경륜적 삼위일체론) 사용할 근거로 제기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 폴 영이 삼위일체 신앙을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을 돕는 과정에서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준 것은 그동안 서로 단절되었던 기독교신학과 기독교문화가 상호 작용을 통해 기독교인의 신앙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주고 또 확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의 상처의 진원지는 어디이며 또 어떻게 해야 그 상처에서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오두막>은 삶의 치유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변화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준다. 곧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행위를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이 삶의 변화임을 증거 한다. 내용은 맥(샘 워싱턴)이 겪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 회복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의 가정 폭력은 그나마 13세에 가출을 통해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맥을 오도 가도 못할 정도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일은 어린 막내 딸 미시를 유괴범에 의해 잃은 사건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상실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맥은 가족 모두에게조차 소원해진 상태다. 딸도 잃고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도 잃고 또 친구와의 관계도 심지어 신앙도 잃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근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회복되어 건강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 영화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적한다. 맥이 왜 절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깊은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공감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한 사람의 삶의 변화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듣게 된다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믿기진 않아도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고 또 회복되어 현저하게 느낄 수 있도록 변화된 삶을 산다면, 그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의 진실성을 증거 하는 일은 아닐지 싶다. 맥에게 일어난 변화에 영화는 집중한다.


맥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은 예기치 않고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행이다. 더군다나 딸 미시는 가족 중에서 더욱 특별하게 여겨지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갑작스럽게 잃고, 더군다나 유괴범에 의해 납치되어 사망했다는 흔적만 있을 뿐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맥은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족으로서 신앙을 잃었다는 사실은 맥은 물론이고 가족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맥의 삶을 새롭게 또 건강하게 변화시켜 가족이 다시 한 번 회복하게 된 사건은 오직 맥에게만 일어난 하나님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사실인지, 과연 믿을 만 한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맥의 회복과 갑작스런 삶의 변화는 아내는 물론이고 친구와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하나님 경험을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맥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기회였다.




3.

결국 맥의 삶에서 변화를 일으킨 사건은 불행과 회복이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일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두막이라는 곳에서 발생한다. 작가의 이런 역설적인 설정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통찰을 엿보게 한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적으로 표현된 맥의 하나님 경험에서 신학적으로 특별히 주목할 만한 몇 개의 장면을 살펴보자.


첫째는 파파로부터 온 편지다. 배달한 사람도 없이 받게 된 편지에는 고통으로 번뇌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맥을 오두막으로 초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딸의 죽음을 확인했던 곳인 오두막으로 오라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초대장에 응답했을 때 맥은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초대는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일들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것의 현실은 예배에서 구체화된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름으로 시작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일상의 삶에서 예배로 부름을 받을 때 응답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도 믿음으로 응답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예배의 장소로 나아간다.


둘째는 오두막이다. 영화와 소설의 제목인 오두막은 다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곳은 딸의 죽음을 확인했던 곳이며 또한 부름의 장소이다. 상처의 진원지이며 또한 회복의 장소이다. 이것은 복선을 담은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상처를 피하려고만 하지 그것을 직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결국 내 자신에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면, 어떤 유혹에도 반응할 수 없듯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은 상처 받을 요인이 내 안에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상처를 피하지 말고 직면할 때 비로소 치유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영화는 맥의 상처가 단지 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아내가 하나님을 파파로 부르며 신뢰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그의 상처는 유괴범에 대한 증오로부터 왔다.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맥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출하면서 살충제를 술에 타 넣은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나타나 과거의 모든 일과 관련해서 서로 화해하는 경험을 하면서 맥은 비로소 유괴범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자신의 죄를 숨기고 살았던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이유였던 것이다.

오두막이 갖고 있는 이런 의미는 십자가가 고난과 영광의 양면성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임을 알 수 있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심판자로서 지혜와 대면하는 장면이다. 깊은 동굴 속에 위치해 있어도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혜임을 엿볼 수 있도록 잘 연출되었다. 지혜와의 만남은 많은 점에서 창세기 3장을 연상케 하는 장면인데, 영화에서 지혜는 모든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면서 살려 한다는 점을 맥에게 확인시켜 준다. 맥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지혜는 맥이 겪는 고통이 스스로를 심판자로서 자리매김하기 때문임을 확인시켜준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할 때 이기적인 판단을 피할 수 없으며, 또한 세상을 공정하게 볼 수 없게 됨을 맥은 깨닫는다. 성경은 인간의 바로 이런 모습을 죄의 원형으로 소개한다. 심판자의 자리에 있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을 맡길 때 삶의 모든 혼돈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두막>은 고통의 진원지와 회복의 장소가 동일한 곳임을 말하면서 문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 자체에 있지 않음을 말한다. 오히려 문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또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말한다. 영화 속 오두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었고, 오늘날 그곳은 예배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오두막>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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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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