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로건> 보기 - 포스트휴먼 시대일수록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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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시리즈 <로건>을 관람한 후 받은 인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종말론적이며 또한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울버린(휴 잭맨)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은 대개 자신이 잊히지 않고 기억되길 원한다. 제사 문화는 그 결과이다. 기억되기 원하는 마음은 영원한 기억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자신을 닮은 존재가 태어나 세대를 이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적어도 여호와를 신앙하는 구약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영생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영원히 산다 함은 자손이 끊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을 육에 매이게 만든 굴레로 작용했다. 그들로 하여금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며 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DNA(혈과 육)의 존속이 아니라 정신의 지속, 곧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현실이 되게 하는 것에 방점을 두었고 또한 자기에게 일어났고 또 성취되었던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내어드리는 것을 제자도의 핵심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울버린의 죽음은 숙연했고 또 남다른 재능 때문에 누군가에게 통제 받으며 도구로 살기보다 본성에 따라 주체적으로 살 것을 메시지로 던진 것은 매우 철학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로건>은 또 다른 점에서 오늘 우리시대에서 곱씹어볼 만한 화두를 제기한다. 다시 말해서 소위 포스트휴먼 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한다. 포스트휴먼이란 말이 아직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포스트휴먼이란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융합할 수 있는 디지털 컨버전스 덕분에 가능해진 것인데, 호모 사피엔스를 뛰어 넘는 휴먼을 말한다. 옥스퍼드 대학 철학교수인 닉 보스트롬은 포스트휴먼을 현생 인류가 인간 종을 더 이상 대변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변화되어 이제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했다. 지금까지 사이보그(cyborg=Cybernetics+Organism)로 표현된 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물론 포스트휴먼은 인간의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형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나노테크놀로지, 바이오테크놀로지, 정보통신기술, 뇌 신경생리학(뇌 과학), 로봇 기술을 뒷받침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 개발된 기술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인간(호모 사피엔스) 이상의 기능을 갖도록 변화된 인간을 가리킨다. 인공지능을 포함해서 유전자복제 및 변형 그리고 약물사용 등의 방식으로 정상적인 인간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통제 가능한 상태의 인간이다. 이런 일이 일반화되는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휴먼 시대라 한다.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대체하는 기계의 등장은 이미 현실화되었고, 인간 자체를 대체할 로봇의 등장은 눈앞에 두고 있다.

 

학자에 따라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보통 포스트휴먼은 트랜스휴먼을 거쳐 이뤄진다. 예컨대 처음에는 신체 일부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지만,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이제는 인간의 기능자체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개발에 개발을 더하고 있고, <채피><엑스 마키나>에서 볼 수 있듯이,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면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할 새로운 종의 인간이 태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간은 트랜스휴먼을 거쳐 포스트휴먼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왜 기능을 향상하길 원할까? 기능 향상으로 얻을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삶의 질이 개선될 뿐만 아니라(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공와우이식을 거부하는 농아인들이 있는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대체할 기계사용에 항상 동의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 연장된다. 이 밖에 인간이 향상된 기능을 갖게 되면, 경쟁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익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독점된다는 현실에 비춰본다면, 기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어디까지 계속 이어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포스트휴먼의 한계는 이미 <바이센터니얼 맨>(크리스 콜럼버스, 1999)에서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포스트휴먼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흐름과는 반대로 로봇이 인간이 되길 바라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포스트휴먼의 한계는 신학적 인간학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련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신학적 인간학은 철학적 혹은 과학적 인간학에서 추구하는 무한한 확장의지에 최소한의 한계를 설정하고 시작한다. 곧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의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그것이 갖는 함의는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이며, 이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고 또 폭력을 행사한 불미스런 역사도 있지만, 하나님 없는 인간의 탐욕이 극대화되었을 때 나타난 불운한 역사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의 공통점은 인간의 탐욕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전자는 하나님을 남용한 결과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신학의 문제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뜨린 이유는 무한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시도가 초래하는 위험 때문이었다. 바벨탑 사건은 포스트휴먼을 시대적으로 당연한 듯이 과제로 삼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신학적 인간학의 전제와 출발점을 무시하는 인간은 법이 제정되고 또 적절하게 규제할 수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망은 진정 법으로 통제 가능할까? 미국 CIA가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또 얼마나 침해했는지를 전 세계 언론에 폭로한 스노든이 현대사회에 던진 화두는 국가가 불의를 국가의 안전과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서나 적대국가와의 관계에서 뛰어난 정보력과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포스트휴먼의 필요성은 당연시된다.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뛰어난 전문적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여러 영화들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로건> 역시 이런 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기능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계획을 전제한다. 이미 사라진 엑스맨에게서 취한 유전자를 복제하여 통제 가능한 강력한 군인을 만들려는 계획을 실행하는 중에 그들이 자신의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모두를 제거하려 한다. 경쟁력과 전투력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노력이 어떤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울버린(휴 잭맨)은 자신의 분신인 로라에게 하나의 기능으로 전락해 다른 사람에게 통제받으며 살지 말고 본성대로 살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본성은 유전적으로나 기계적으로 혹은 유전공학적으로 혹은 약물로 향상된 기능인으로서의 본성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통제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예로서의 본성을 말하지도 않는다. 미션을 수행하며 통제받는 기능인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의 한계는 자본에 의해 기술이 독점되는 현상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포스트휴먼을 위해선 많은 자본을 투자해야 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선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병원에 설치된 고가의 의료시설이 고가의 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현실을 생각해보라. 트랜스휴먼의 현실에서도 이미 빈부의 차이는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화 <엘레시움>이 폭로하고 있듯이, 이 땅의 천국은 어쩌면 고가의 의료시술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혜로 여겨지지는 않을까. 포스트휴먼 시대에 경제와 의료적인 면에서 평등한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은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인공지능시대가 되면서 포스트휴먼의 등장은 점진적인 그러나 빠른 속도의 트랜스휴먼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 같다. <디스트릭 9><채피>에서 볼 수 있지만, 인간은 인종적/성적/종교적/기계적인 타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해왔다. 포스트휴먼의 등장과 함께 염려해야 할 점은 바로 새로운 인류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다. 기술 개발과 병행하여 이것을 예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수와 힘에서 역전이 되어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온다면, 오히려 소수 인간이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급하게 테크노포비아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만일 그것이 기능적인 면에서 인간의 변형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갖는 이익만 생각해서 그것의 신학적 인간학적인 함의와 위험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도록 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 혹은 타인의 구원이나 행복을 위해 굳이 기능을 무한히 확장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전능하시고, 또한 인간과 그의 구원을 돕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최성수 박사가 본 <로건>은?   기독교적 가치  (3.5)         작품성 (4.0)         대중성 (3.5)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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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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