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판도라> 보기 : 각자도생,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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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행한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

<판도라>는 재난영화다. 자연재해가 아닌 원전 사고를 다룬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경각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져, 독일은 원전의 완전 폐지를 정부정책으로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원전의 추가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 동남부 지역에서 발생하는 잦은 지진 소식은 그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원전 건설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오직 정부만 아랑곳하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영화 제목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빗대어 만든 제목이기 때문에 신화에 대한 이해는 영화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다른 신들에게서 받은 선물이 졸지에 불행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단지를 판도라는 결코 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판도라는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열었고, 그 후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들끓게 되었다. 자신의 행한 일의 결과를 보고 놀란 판도라가 화급히 뚜껑을 닫았으나 상자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게 된 것은 희망뿐이었다. 이 신화는 현실의 양면성을 전제하며, 세상에 있는 숱한 부정적인 일들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희망임을 시사한다.

신화와 달리 철학자 플라톤이 부정적인 현실과 이 문제를 대하는 방식은 달랐다. 플라톤은 인간의 불행을 숙명적으로만 보지 않았고, 오히려 인생의 고통과 번뇌가 인간의 육체성에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의 조건에 매이지 말고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에 갇혀 있는 영혼이 이데아를 인식하고 또 더 나아가 원래 영혼이 속해 있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영혼의 인식을 통해 현실의 불행을 극복하고 또한 궁극적인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은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신화적인 방식이 아닌 철학적인 방식의 문제해결책을 제시했다.

 

판도라 신화는 판도라 상자라는 은유의 기초가 되어 세상에서 회자한다. 신화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이야기를 인간의 현실을 이해할 때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다 해도, 기독교적으로 공감할만한 점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불행한 현실들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며, 실제적인 원인은 인간의 죄성과 거기서 유래하는 그릇된 행위에 있고, 이 모든 불행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리고 그를 희망하는 데에 문제의 해결이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현실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현실에서 진리를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며, 오히려 문제 해결의 관건을 현실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며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 둔다. 초월적인 것만을 지향하면서 현실을 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인간에게만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신화와 철학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전혀 외면하지 않는 제3의 길을 간다.

 

2. 영화 이야기

영화 <판도라>는 판도라 상자 이야기를 빗대어 대한민국의 원전문제를 조금도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다룬다. 비록 신화를 떠올리는 제목을 사용해 가상의 현실을 다뤘지만, 시선은 철저히 현실로 향한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심히 안타깝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다.

 

최근에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 지진 발생이 잦다는 사실은 국민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바다. 이를 계기로 새롭게 주목한 사실은 원전이 위치한 곳이 대형 지진이 발생할 수 있는 지층 위라는 것이고, 설상가상으로 원전이 인구가 밀집해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영화 속에서 보는 예상할 수 있는 재난의 규모와 범위, 그리고 국가적인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과 거짓으로 일관하는 변명이 결코 영화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국민들의 혼란과 절망감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정부의 통제와 검열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그것도 과거 한 차례 정부와의 갈등을 겪어 책임자가 경질되는 사태를 치렀던 CJ에서 어떻게 이런 정부비판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 속 현실은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고, 심지어 무능한 대통령 이미지까지도 쏙 빼닮았다. 과연 판도라 상자로 비유된 영화 개봉으로 정치나 원전 정책에 미칠 파급효과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감독은 영화 자체를 하나의 판도라 상자로 제시한다. 개봉 자체가 뚜껑을 여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개봉되지 말았어야 할 영화이지만 개봉됨으로써 그동안 은폐되었던 온갖 진실들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그런 영화라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발생하는 원전사고와 거기서부터 비롯하는 각종 재난에 관한 이야기는 판도라 상자가 열렸을 때 펼쳐질 진실 아니 불행한 현실의 모습이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심각한 불행은 정부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겠지 싶다.

 

한편, 감독은 왜 원전 사고와 그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판도라 상자로 비유하게 되었을까? 원자력의 위력과 원전 사고의 참상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를 역사와 매스컴을 통해 잘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다수는 아직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원자폭탄과 원전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도 듣고, 사진과 영화를 통해 방사능 피해가 얼마나 끔찍한지도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감독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원전사고의 실제를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느껴 경각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제작한 것 같다. 그래서 영화의 60% 정도를 CG로 표현했으면서도 핍진성을 높여 관객이 마치 실제로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했다고 생각한다. 관객은 영화를 봄으로써 졸지에 판도라가 되어 단지의 뚜껑을 여는 주체가 된다.

 

일종의 판도라 상자로 비유된 영화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진 발생 가능지역에 원전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지층 및 지질 연구가 없지 않았고, 지진 발생지역임을 지적했지만, 정부기관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원전건설 계획을 추진하였다. 둘째는 원전의 기능과 그것이 주는 이익만을 생각했을 뿐, 그것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 그리고 심각성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원전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낙하산 인사로 임명된 경영자는 샴페인을 터뜨릴 줄만 알았지, 안전한 원전을 위한 대책마련에는 소홀히 하였다. 셋째는 원전 운영에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나자 자기만 살겠다고 서둘러 도망가는 사람들이다. 넷째는 재임 중 업적만을 중시하고 또 정치적인 셈에만 밝은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국민들의 안전에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자신들의 책임을 피할 궁리만 한다. 다섯째, 원전 때문에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원전 건설 반대 운동이나 원전 폐기 주장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원전에 고용된 사람들이나 또한 원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존해 있는 상권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원전은 생계유지를 위한 주요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불행의 요소들은 원전사고가 발생하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원전 주변의 지역은 물론이고 국가 전체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원전사고에서 시작된 국가적인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런 절망상황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시국을 반영하듯이 정부의 무능한 태도와 무책임한 태도에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퍼붓는다. 특히 강재혁(김남길)이 말했던 촌철살인의 대사는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그는 생명을 내놓고 원전사고 현장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 정부의 잘못과 무능 때문에 발생한 재난을 막기 위해 왜 국민들이 책임져야 하고 또 대책마련을 위해 왜 국민들이 희생해야만 하는가라고 외친다. 수많은 국민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3.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상태에서, 곧 정부의 재난컨트롤타워조차도 손을 쓸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도대체 남아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해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강재혁의 신파연기로 대답한다. 재혁의 아버지는 재혁이가 어렸을 때 문제의 원전에서 일어난 방사능 유출 사고로 사망했다. 원전 지역을 떠나보려 애를 썼지만 사업에 실패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호구지책으로 마지못해 원전을 일터로 삼는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떠나려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가족과 여자 친구의 반대에 부딪혀 여의치가 않을 뿐이다. 그러다 갑작스레 일어난 강한 지진으로 원전 사고는 발생하고, 냉각수를 보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다.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더 이상의 피해가 확산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감당해야만 일이었고, 그 일은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일이었다.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 슬퍼하지만 재혁은 자신이 판도라 상자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인지한다.

 

재혁은 방송사와 연결된 상태에서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눈물의 인터뷰를 한다. 영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을 신파장면이라 보니 혹시 상황의 비현실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희망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을 이렇게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연출한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나는 영화가 대한민국이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렸을 때 오직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살 길로 남아 있는 불행한 현실을 폭로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강재혁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희망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을 대변하는 강재혁은 국민이 자신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을 수행한다. 동시에 판도라 상자의 뚜껑은 서둘러 봉합된다. 감독은 이 마지막 장면의 연출을 통해 국가적인 재난에서 희망은 국민에게 있고,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국민이 살길은 각자도생에 있다고 말하려 했을까? 국가 위기 상황에서 왜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은지, 국민들은 왜 각자도생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야 하는지, 서글프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성수 박사가 본 <판도라>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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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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