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죽여주는 여자> 보기 - 누가 이들의 이웃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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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 유신정권의 암울했던 시기에 한국 영화계에는 소위 호스티스 영화가 성황을 이뤘다.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으로써 어쩔 수 없이 호스티스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애환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장호 감독처럼 유신정권의 사전 검열 때문에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지 못한 절망감을 표현한 영화 <바보선언>(1983)이 제작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975), <겨울여자>(김호선, 1977) 등 유신정권 시대에 만들어진 호스티스 영화를 단순히 정치사회적인 절망감을 대체하는 작품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정적이고 퇴폐적이라는 비난은 받았지만, 그것은 예술로서 영화를 오해한 결과다. 영화 속 호스티스들은 불의한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은 시대의 어둠을 은유한 것이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매춘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사회성을 고려할 때 이런 보기 방식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재용 감독의 작품 <죽여주는 여자>는 매춘에 종사하는 노년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독거노인의 절망적인 삶의 환경을 포함해서 트랜스젠더나 장애인 그리고 혼혈아에 관한 이야기도 삽입되어 있다. 영화는 주로 노인 매춘을 다루고 있지만 여러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들의 삶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죽여주는 여자>에선 호스티스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매혹적인 여성과 그녀의 불행한 삶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호스티스라는 직업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는 은유로 사용되었듯이, 이재용 감독은 매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박카스 아줌마'의 삶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부조리한 현실들을 엿볼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2.

'박카스 아줌마' 소영(윤여정)은 살기 위해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판다. 직업 분류에 따르면 소영은 매춘에 종사하고 있다. 봄을 사려는 남자에게 '봄'을 판다. 봄은 생명의 기운을 상징하기에 그녀가 파는 것은 생명의 기운이다. 성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면서 또한 생명의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흔히 성은 거룩하게 여겨지지만 순간적인 오르가즘만을 선사할 뿐 금방 허탈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매춘은 불결한 직업이고 또 성매매는 덧없는 욕망이라 폄하된다.

소영은 성적인 서비스에서 남자들의 만족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다하기 때문에 소위 죽여주는 여자로 통한다. 먹고 살기 위해 젊어서는 동두천 양공주가 되어 몸을 팔았는데 세월이 흘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그녀의 매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월은 흘렀어도 사는 환경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선 생명을 교감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자신이 아직도 남자임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혹은 아내와 사별한 후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성인임에도 성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장애인들 그리고 동성애적인 정체성이나 취향 때문에 통념상 정상적인 성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매춘은 비록 순간일지는 몰라도 하루 아니 일주일 아니 한달 이상의 생명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먹고 살기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던가. 비록 거창한 의미를 갖다 붙여 포장되어 있긴 해도 모두 먹고 사는 목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토록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매일같이 사표를 던지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화이트칼라도 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수모를 겪으며 사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그것이 회사와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또한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니 참고 지내는 것이다. 먹고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다소 서글픈 생각이 들지만 최소한의 의미 부여로 그날그날 견뎌나갈 뿐이다.

 

소영의 매춘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영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매춘을 시작했지만, 그녀에게는 제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어려서 입양을 보내 비록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어도, 만일 살아있기만 한다면, 건장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만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조차 포기하진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녀가 건물 앞에서 홀로 서 있는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고 또 패스트푸드점에서 한국 여성과 미국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젊은 군인을 보고 놀란 것도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음이 가져올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노인들을 위해 회춘을 돕는(?) 역할을 한다. 소영에게 매춘은 한편으로는 먹고 사는 수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월을 이기며 살기를 원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또 어디선가 살아 있을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한 삶의 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빠에게 버림을 받은 아이를 돌보는 수단이었다.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다만 이 세상의 혼혈아들이 누군가에게 입양되어 잘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자신의 아들을 입양 보낸 그녀에겐 적지 않은 희망이었다.

 

3.

소영을 거쳐 간 많은 노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살아갈 기운이나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중풍으로 쓰러진 이후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은 가족이 있어도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가족도 없이 치매에 걸려 기억력을 잃어가고 있는 노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미래가 두렵다. 아내와 사별하고 난 후에 암에 걸려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노인은 누군가 함께 있는 곳에서 죽기를 희망한다. 병들어 더 이상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서 삶의 기운을 얻어갔던 사람들은 이제 그녀에게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어줄 것을 기대한다. 삶을 위한 기력을 얻은 사람에게 죽음을 요구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감독은 죽여주는 여자에게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소영은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못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안락사로, 사고사로, 혹은 자살 방조로 그들이 원하는 죽음을 돕고 또 외롭게 죽어가지 않도록 죽음의 순간에 곁에 있어준다.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어 모르지만 그녀가 죽음에 조력한 까닭은 아마도 공감이 아니었을지 싶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히려 가족에게 짐으로만 여겨지는 사람들, 그렇다고 자신처럼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그녀에겐 그다지 힘겨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전혀 상반된 의미에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결코 상반된 의미로 이해되진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움을 돕는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비록 세 경우만을 제시했지만, 노령인구가 점점 늘어가는 시대에 노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문제들을 공감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4.

소영이 젊어서 동두천 양색시가 되어 몸을 팔게 된 것이나 나이가 들어 종로에서 '박카스 아줌마'가 된 것은 사람답게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최소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노인들이 마지막 붙은 목숨을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버리려는 것도 인간다운 삶을 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스스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나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나 모두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이, 이재용 감독은 '박카스 아줌마'의 매춘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빈곤과 외로움의 한파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노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인지되어야 하는지를 환기한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렇다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노인들의 현실을 폭로한다. 그들에게 따뜻한 이웃이 부재함을 표현하였다. 그는 매춘이나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끝으로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소영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은유하는 캐릭터일까? 그녀의 매춘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도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 노인의 삶을 돕고 또 누구도 하지 않는 노인들의 죽음을 돕는다. 법적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행위로 구속되지만, 영화 속 소영과 그녀의 행위를 욕하긴 쉽지 않다. 그녀는 젊어서부터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인간다운 삶을 도운 사람은 없었고,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에 평안하게 안식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도 없었다.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었을 뿐이다. 소영은 비록 자신에게는 한 명의 이웃도 없었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자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일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대한민국에서 이웃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노인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환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땅의 노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위해 고민해야 할 때다. 교회가 아니면 누가 그들의 이웃이 될 것인가?

 

 최성수 박사가 본 <죽여주는 여자>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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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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