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보기 : 율법과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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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년에 이란 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인데, 그는 지난 74일 암으로 사망했다. 고인의 소식을 듣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력을 살펴보는 중에 오래 전 보았던 영화를 다시 한 번 볼 기회를 가졌다. 과거에는 이란 사회에 가득한 폭력성의 기원에 집중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면서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친구의 집을 찾아서

영화는 이란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작한다. 네마자데는 정해진 공책에 숙제를 해오지 않아 선생님에게 심한 꾸중을 듣는다. 벌써 세 번째라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퇴학처분을 하겠다는 엄한 경고를 받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마드는 선생님의 꾸중을 듣고 흐느끼는 네마자데를 바라보며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교 후 집에 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네마자데 공책을 자신이 가지고 온 것이다. 네마자데는 또 다시 공책에 숙제를 해올 수 없게 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대로 지내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숙제를 정해진 공책에 해오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대로 네마자데는 퇴학처분을 받게 된다. 비록 말은 안했지만, 아마자데의 공책을 자신이 가지고 온 사실을 알게 된 아마드의 얼굴에는 네마자데에게 일어날 일들로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해서든 네마자데에게 공책을 전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대로 심부름을 시키고 또 먼저 숙제하기 전에는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한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아이들의 버릇과 습관을 옳게 들인다는 이유로 네마자데의 시간을 빼앗는다. 아마드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다 수행해야 좋은 아이가 되고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고 어른들은 말하지만, 아마드에게는 자신의 의무보다 네마자데의 의무, 곧 반드시 공책에 숙제를 해야 하는 의무가 더 시급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아마자데는 퇴학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마드는 엄마 몰래 네마자데가 사는 곳까지 달려가서 아마자데를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결국엔 해가 떨어질 때까지 헤매다 찾지를 못하고 절망적인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해낸 것은 자신이 숙제를 대신 해주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마드에게 공책을 넘겨 받은 네마자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선생님은 그의 공책에서 한 송이 꽃을 보았다.

굉장히 단순한 구조의 영화다. 게다가 비전문 배우를 등장시키고 세트가 아닌 실제 장소를 사용하여 촬영했는데도 마치 실제처럼 여겨질 정도로 사실주의적으로 잘 만들어졌다. 이란 사회와 교육의 현실을 엿볼 수 있고,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 이란 사회가 얼마나 어른 중심으로 구조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아마드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이란 사회가 세대를 이어가면서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픈 숙명을 폭로한다. 아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선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구실을 만들어 매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다.

 



의무가 먼저인 사회에서 관용한다는 것

필자가 이번 영화감상에서 주목하게 된 점은 아마드를 향한 어른들의 시선과 아마드의 시선의 충돌이 일으키는 파열음이다. 아마드를 향한 어른들의 시선은 네 의무를 먼저 이행하라는 것이다.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에선 그것이 장래를 위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들의 질문에는 대답을 해야 하고, 네 숙제를 먼저 마쳐야 하며, 어른들의 심부름은 아무런 토를 달지 말고 이행해야 하며, 의무를 이행하지 못해 네마자데에게 일어날 일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라는 논리다.

 

그러나 아마드가 자신을 보는 시선과 타자, 곧 네마자데를 향한 시선은 달랐다. 아마드는 네마자데가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공책을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무를 조금 미루더라도 불행한 일이 친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마드는 엄마와 할아버지의 말을 어겨가면서 네마자데를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결국 친구의 집을 찾지 못해 공책을 전해주지 못했지만, 아마드는 친구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 어른들의 만류와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임 있게 행한 것이다. 타자의 구원을 위해 아마드는 부모에게 혼나는 것은 물론이고 밥도 굶고 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고생을 감수하였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여겨질 수 있는 일이지만, 이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무를 우선적으로 이행해야 인정받는 사회의 한계를 지적한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의무를 중시하는 사회, 곧 율법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용서와 관용과 사랑을 통한 선교가 먹히는 이유다.

 


나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아마드의 시선과 자신의 의무를 미뤄놓고 네마자데에게 공책을 전해주러 길을 떠나는 아마드를 보면서 필자의 머리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모두들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도 만나 사람을 지나쳤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은 가던 길을 멈추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 노력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었음에도 그는 멈추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성경에서 비유를 읽었어도 실제로 그의 노력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잘 실감이 되지 않았는데, 아마드가 네마자데에게 공책을 전해주려 가는 길고 힘든 여정을 보면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바라지만, 나 자신을 위한 의무 이행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종교라고 말이다. 비록 현실에선 잘 실현되지 않고, 또 아마드 주변의 어른들처럼 나의 의무 이행을 우선하긴 해도, 본질에 있어선 타자의 구원을 위해 더 애를 쓰는 것을 중시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장해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시선을 나에게서 돌려 타자에게 향하는 종교다. 자신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타자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타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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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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