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터널> 읽기 - 몇 개의 터널을 더 지나야 하나



반응형


어디가 출구인지 가늠할 수 없고 또 대체로 막혀 있는 굴과 달리 터널은 반드시 출구가 있는 토목 구조물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기차나 자동차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든 통로다. 높은 산을 넘어 가야 할 때나 강과 바다 반대편으로 가야할 때,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는 먼 길을 우회하거나 꾸불꾸불한 도로를 오르고 또 내려가야 했다. 터널은 이 모든 수고를 덜어준다. 거리를 단축시켜 시간과 기름을 절약하게 한다. 단절된 도로를 이어주는 다리와 더불어 터널은 자연에 마냥 순응하며 살지 않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는 인간 의지의 단면을 확인해주는 토목 구조물이다. 현대토목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하다.

 

입구 앞에 터널 표시와 함께 터널 길이도 적혀 있어서 사람들은 비록 어둡고 답답한 기분이 들어도 반드시 출구가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터널에 들어선다. 그래서 터널은 때때로 끝이 있는 시련의 시기를 비유한다.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는 말은 현재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표현한다. 끝이 있는 시련은 인내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국면을 기대할 수 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터널은 희망이고 굴은 절망이다. 또한 터널은 신뢰에 대한 기호이기도 하다. 이미 개통된 터널 앞에서 통과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터널 표시만으로 사람들은 출구를 믿고 아무 의심 없이 입구에 들어선다.

 

그런데 터널이 굴이 되는 경우는 공사가 중단되었거나 터널이 붕괴했을 경우다. 터널 공사가 중단되었다면 애초에 들어설 일도 없었을 테지만, 터널이 붕괴하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터널은 당연히 통과할 길로 여겼기 때문에 들어선 곳이라 터널 붕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일 수밖에 없다. 비록 발달한 토목기술 때문에 가능해진 구조물이라도 터널을 통과하면서 갖는 안정감은 사실 토목기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터널이라는 기호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대체 터널을 가능하게 한 토목기술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신뢰하고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터널이 있다는 것 자체가 통과할 수 있다는 신뢰를 준다. 그런 점에서 터널은 사회적인 약속인 셈이다. ‘터널임을 알리는 교통표지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과할 수 있다는 기호이다.

 


그런데 터널이 붕괴되어 갑자기 굴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재해로 일어난 일이든 아니면 부실공사로 빚어진 결과든, 터널 붕괴는 사회적인 신뢰관계의 붕괴다. 정부가 보장한 토목구조물이기에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출구가 막혔다면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만, 만일 입구 쪽도 붕괴되었다면 터널에 영락없이 갇힌 상태가 된다.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믿고 들어선 곳에서 갇힌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밖에서 구조해주지 않으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터널 붕괴로 비록 신뢰가 무너졌다 해도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생명의 의지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존중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적인 신뢰가 무너졌어도 인간의 생명존중 사상에 대한 신뢰는 아직 남아 있기에 사람들은 비록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게 된다 해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사고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만일 사고가 구조대에 알려졌다면, 최소한 구조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생명을 지켜줄 의무가 있는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 어떤 상황에서든 구조를 요청할 수 있고, 정부는 구조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영화 <터널>은 터널이 갖는 의미와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타의 재난 영화와 비교해볼 때 형식에서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일단 재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이야기가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한 남성 가장이 집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재난 상황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다만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지밖에 없다. 함께 터널에 갇힌 여성을 돕지만, 구조를 위한 영웅적인 노력이기보다는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그녀가 살았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콘크리트 잔해였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 절망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그것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발휘한 것은 그가 구조의 영웅으로 설정된 캐릭터가 아님을 잘 말해준다.

또한 보통은 재난과 구조의 역학 관계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펼쳐 보이지만, <터널>에서 재난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발생한다. 영화가 재난의 이유보다는 구조의 노력과 이것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관심을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터널이 설계도와 다르다는 사실을 환기하거나 터널 공사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부실공사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장면은 재난이 곧 인재임을 폭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주로 터널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 노력과 사건에 대한 정부의 태도 그리고 돈과 생명을 두고 사람들이 무엇에 기울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언론은 자극적인 뉴스를 생산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정부는 구조의 제스처를 보이고 또 자신의 국정 활동을 홍보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피해자 가족과 사진을 찍으려는 정부 관료들의 태도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웃픈 상황이다. 희극적이라 웃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현실이 너무 섧다. 게다가 잘못된 설계도로 구조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고, 구조를 위한 작업을 하다 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부와 기업 그리고 언론은 갇혀 있는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혹은 경제적 손실을 입어야 하는지 계산하는 일로 바쁘다.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이 터널에 갇혀 있음을 환기하는 구조대장(오달수)의 말은 돈과 생명을 놓고 저울질하는 정부와 기업의 태도를 꼬집는다.

 

한국 사회는 앞으로 몇 개의 터널을 더 지나야 밝은 빛을 볼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정상화는 몇 개의 터널을 더 지나야 볼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 살면서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터널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 혼자만의 정서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터널>은 국민들이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절망감을 그대로 표현한다. 특히 영화가 앞뒤 가리지 않고 터널 붕괴로 시작한 장면은 국민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겪는 깊은 절망감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재난 영화는 여름 시즌 마다 등장하는 장르이지만 <터널>은 오늘 우리에게 제철음식으로만 소화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 세월호 사건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비록 이전부터 진행된 추락 과정이지만,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부터 더욱 심화된 사회적인 신뢰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영화는 돈과 생명을 저울질하는 정부와 기업의 태도를 통해 인간의 생명에 대한 기대마저도 무너진 한국의 현실을 폭로한다. 이런 점에서 <터널>은 국민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구원을 묻는 영화다. 대한민국은 몇 개의 터널을 더 지나야 밝은 빛을 볼 수 있을까? 아니 터널붕괴와 같이 갑작스레 마주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1998년에 나온 안치환의 앨범 “Desire”에 수록된 노래 중에 얼마나 더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 일부가 떠오른다.

 

얼마나 더 눈물 흘려야/이 먼 길의 끝을 있을까

얼마나 더 걸어가야/그 많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걸어가야/그 많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그 많은 질문에/대답할 수 있을까

 


터널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터널에 갇혀 있는 듯이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한국 교회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일부 지도자들이 윤리적 도덕적 타락은 물론이고 심지어 양심의 타락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과연 이 질문들에 대답할 자격은 있는 걸까? 누가 터널에 갇힌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기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외칠 수 있는 말이 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최성수 박사가 본 <터널>은?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화선교연구원의 소식 받기

* 페이스북 www.facebook.com/cricum << 클릭 후 페이지 '좋아요'를,

* 카카오스토리 story.kakao.com/ch/cricum << 클릭 후 '소식 받기'를 누르시면 새롭고 유익한 글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