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시대의 청년 그리스도인에게 고함 - 영화 <동주>와 <일사각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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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시대의 청년 그리스도인에게 고함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권혁만 감독의 <일사각오>-

 

강진구(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교수, 영화평론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은 두 편의 최근 영화 <동주><일사각오>는 서로 닮았다. 영화 <동주>가 창씨개명과 국어 사용 금지를 통해 조선인의 이름과 모국어에 대한 꿈을 앗아가려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며 이에 대한 시인 윤동주의 고통과 저항을 담았다면, <일사각오>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민족 사랑과 신앙의 정절을 지킨 주기철 목사의 고난과 결단의 삶을 보여주었다. 시인과 목회자라는 사회적 역할은 달랐어도 두 사람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죽음으로 지켜냈다.



두 영화는 표현 방법과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크게 두 가지의 유사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일사각오>는 사실에 가깝게 제작된 드라마란 뜻으로 팩션 드라마란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홍보에 사용하고 있다. 사실(Fact)에 충실하면서도 드라마적 감동을 주기 위한 소설적 상상력(Fiction)을 사용한 장르를 팩션(Faction)'라 부르는데 <일사각오>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지난해 KBS 1TV에서 성탄절 특집으로 방송된 내용에서 드라마를 대폭 강화하면서 기존 방송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의 극장용 영화로 탄생했지만,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애국정신이 역사적 사실임을 뒷받침하려는 굳건한 의지는 여전하다. 일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신사참배는 물론 궁성 요배(일본 천황이 사는 황궁을 향해 절을 하는 것)를 감행하는 당시 목회자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 영상물이 영화를 통해 공개된 것이나, 주기철 목사의 목회 현장에 있었던 연로한 생존자들의 증언이 드라마 곳곳에 자리한 것은 영화의 내용과 주제가 역사적 사실임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오직 드라마로만 구성된 <동주>의 경우는 흑백 영상을 통해 역사적 사실성을 인식시킨다. 고화질의 스마트폰과 순도 높은 색을 보여주는 SUHD TV가 생산되는 오늘날 흑백 영화를 택한 것은 이준익 감독이 <동주>를 통해 시를 잃어버린 오늘날로부터 돌이켜 과거의 낭만적 감성을 조명하려는 의도에만 머무르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흑백으로 입혀진 영화 <동주>는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또한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기록영화처럼 흑백 영상으로 처리됐을 때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컬러필름이 없던 시절의 모습을 담은 옛날 영상에서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듯이 흑백화면으로 처리된 시인 윤동주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 못지않은 최고의 감수성을 가진 민족의 시인이 비극의 역사 속에 존재했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두 영화 모두 지금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됐던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우리는 <동주>의 주인공이 문학청년이었으며,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를 바라보며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려는 의지를 시로 표현하고 있는 인물이었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요즘 우리가 찾아보기 힘든, 즉 우리가 잃어버린 청년의 모습인 까닭이다. 의사나 변호사가 아닌 시인의 길을 택한 젊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뭔가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간다는 느낌이 묻어나는 것은 영화 속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청년 윤동주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조선 사람이란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오늘날로 치자면 윤동주는 일반 사람들이 감히 넘보기 힘든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생으로서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안정된 삶을 추구할 만한 신분이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런 엘리트가 고작 시나 써서 되겠냐는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기 십상이고 혹시라도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힘쓸 나이에 도대체 시인이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 법한 시절인 것이다. 독립군에 뛰어든 절친 송몽규처럼 시인보다는 암살자가 더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부끄러움이 많은 시인 윤동주를 전면에 앞세운다. 자신의 시를 통해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도록 선동한 일이 없어도 그는 역사와 신앙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시 하나하나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대학입시용 시만 읽어왔던 현대의 청년들에게 영화 <동주>는 우리가 잃어버린 문학의 아름다움만 일깨워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늘날 청춘들을 향해 역사에 남을 만한 혁명가를 꿈꾸라고 부추기지도 않는다. 세속적 안녕과 영달을 위해 취업에 매진하는 청춘들을 향하여 <동주>는 폭풍 같은 시대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바로 세울 뿐이다<일사각오> 또한 마찬가지다. 부와 권력이 우상이 되고, 누구나 그 앞에서 머리 조아리기를 거부하지 않는 시대에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직 믿음으로 일본제국주의 자들과 맞섰던 그 당당함을 현대의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갖고 있을까?

높은 실업률과 취업난, 거기다 대졸 취업자의 약 40%가 비정규직인 대한민국 청년들의 현실은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다는 의미의 신조어 헬조선(Hell朝鮮)’을 탄생시켰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독립을 꿈꾸며 만주로 북간도로 떠나야 했던 조선의 청년들이 그토록 원했던 대한민국 땅이 괴로운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나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윤동주) 


역사와 현실을 직면하되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 결코 없기를. 윤동주가 서시에서 밝혔듯이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반성 가운데서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세상 무엇이 두려울 수 있겠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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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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