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영화보기 <동주> - 시와 산문



반응형

시와 산문

<동주>

(이준익, 드라마, 12, 2016)

 

최 성 수 *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 동주와 몽규.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두 사람.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어둠의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 네이버 영화 소개


윤동주,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시인으로서 어떤 사람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져보았을 질문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대답을 얻은 느낌이다. 71주기를 맞이하면서 시인 윤동주는 한국문화계에서 이전보다 더욱 크게 부각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에게 걸 맞는 현상이라고는 해도 폭발적인 관심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그동안 필자는 윤동주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했던 고 문익환 목사의 글이나 연전 시절 함께 했던 강처중의 초판 시집에 쓴 발문 그리고 윤동주에 대한 논문들을 통해 마치 퍼즐 맞추듯이 그렇게 윤동주를 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동주>는 무척 반가운 작품임에 분명하다. 영화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시인 윤동주와 차정식 교수가 별의 미학으로 언급한 그의 대표적인 시들을 영화적으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11년 구효서는 동명 제목의 장편소설을 출판하긴 했다. 윤동주의 죽음과 그의 유고시집에 초점을 맞춰 그의 작품을 통해 그를 알아가는 사람의 일인칭 시점으로 구술되는 내용이었는데, 일종의 윤동주 발견하기라고 할 수 있겠다. 구효서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저항시인의 모습보다는 순수시인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영화가 이 글을 어느 정도 참조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는 <배우는 배우다><프랑스 영화처럼>으로 잘 알려진 신연식 감독의 각본에 따라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익 감독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는 작품이다. 특히 과거의 사건들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면서도 현시대적인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의 작품의 특징인데, <동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동주>는 한편으로는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저항시인 윤동주의 모습을 시기적으로, 즉 북간도와 연전 그리고 일본 유학시절의 모습을 영화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세가 아닌 내부의 폭정으로 대한민국의 또 다른 암흑기를 보내며 숨죽이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에 대한 성찰로 이끌어준다. 아니, 성찰의 차원을 넘어 대부분의 민족 시인들이 침묵했던 암흑기에 시작(詩作)을 포기하지 않았던 윤동주의 삶과 죽음과 그리고 그의 주옥같은 대표시들을 들려줌으로써 시대의 문제에 침묵하는 현대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시대를 살고 있을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나." - 릿교대 대학의 다카마시 교수가, 동주에게


흑백으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장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분량의 영화가 전혀 지루하게 여겨지지 않은 까닭은 윤동주 개인의 삶과 그에 어울리는 시를 적재적소에 배치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시를 어렵게 느끼는 까닭은 대체로 시어들에 함의되어 있고 또 시어들 상호간의 작용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적인 관점에서 시 이해를 위해 시인에 대한 연구를 빼놓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란 매체는 특별히 실증주의적인 시 이해와 관련해서 매우 유용한 도구라 여겨진다.

 

<동주>는 윤동주의 일부 시에 대한 영화적인 해석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또 다른 시인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또 그들의 시를 들으며 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영화 제작에 대한 기대가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이창동 감독은 2010년에 영화 <>를 통해 시의 본질에 대해 탐색한 바 있는데, 이렇게 영화를 통해 시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대한민국의 유명 시인에 대한 영화 제작이 이제야 이뤄진 것은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세상이 이러한데 시가 쉽게 쓰여진다는 거 부끄러운일이 아니겠어?"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윤동주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이 평소에 보인 민족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지식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조선의 얼을 지키기 위해 절필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이 당한 고통은 그렇게 새롭게 다가오진 않았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필자에게 도드라져 보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시와 산문의 관계다. 이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틀로 작용하기도 한다. 시와 산문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윤동주와 그의 이종사촌 형 송몽규와의 관계로 형상화 되었다. 송몽규는 1935년 수필 분야에서 신춘문예에 술가락으로 당선해 등단했고, 1938816일 자 조선일보 신문에 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는 문인이었다. 연전시절에도 잡지 편집을 도맡았던 송몽규는 산문을 통해 혁명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산문은 등장인물의 행위나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서술하면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고무할 수 있는 데 비해, 시는 오로지 꿈만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몽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만을 꾸는 시로는 혁명을 결코 이뤄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갈등은 시와 산문의 갈등이면서 또한 행동과 사유의 갈등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은 이 갈등을 제대로 표현하였다.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까"  송몽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오." 송몽규

"동주가 시를 사랑하는 만큼, 몽규도 세상을 사랑해서 그래." 이여진


송몽규와의 관계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모습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한다. 지명도에 있어서나 열정에 있어서 혹은 성격에 있어서 그리고 학문적인 재능에 있어서 윤동주는 송몽규와 많은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때로는 재능의 열세 때문에 열등감을 삼켜야 했고, 때로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문학을 주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순수시를 폄하하는 듯한 강한 어조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사람을 인격으로 보는 윤동주에 비해 몽규는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보았는데, 이런 시각의 차이 역시 갈등의 소지였다. 심지어 윤동주를 심문하는 일본 고등경찰관은 윤동주를 송몽규의 그림자로 규정했을 정도였다. 윤동주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영화 <동주>는 저항시인보다는 오히려 순수 시인으로서 윤동주를 부각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윤동주의 저항 이미지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동안 알고 있었지만 몇 개의 이미지로 유랑하던 시들이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에 제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정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왜 저항시로 여겨졌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한다. 물론 영화 속 그 장면에 나오는 그 시가 원래 삶의 자리였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문학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만, 이준익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인으로서 윤동주의 뛰어난 기량을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물론 이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나-오히려 그의 시가 어떤 상황에서 태동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이것은 영화가 시종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플래시백으로 전개된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 속에서 윤동주로 분한 배우 강하늘의 음성으로 낭독된 시들은 윤동주의 로 들을 수 있도록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동주> 속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의 어우러짐은 시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거나, 어려운 시대에 저항의 도구로 적합하지 않다거나, 혹은 혁명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부족하다는 편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윤동주는 시로서 시대의 아픔을 표현했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지만, 부끄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비극을 시로 표현했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국가가 없는 사람들의 아픔이 어떠했는지를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권을 빼앗긴 국민들에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시대의 고민 앞에서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을 성찰했던 시인처럼, 그의 시는 시대의 또 다른 암흑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준다. 이런 점에서 시 역시 산문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시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이 <>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도 진실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시를 쓰기 시작한 사람은 비록 혈연관계라도 진실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윤동주가 시를 통해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러움을 알았고, 시를 통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비록 힘으로 저항하진 않았으나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진실 자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진실은 비록 묻혀 있는 듯이 보인다 해도 언제든 밝혀지는 법이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진실 앞에 스스로를 세워야 할 것이다. <암살>을 계기로 보여주었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요구가 친일파 후손들이 여전히 득세하는 이 나라에서 다시 한 번 쓰나미처럼 일어나길 간절히 소원한다.


비록 영화는 윤동주의 시가 그가 받은 기독교 교육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북간도 시절의 장면에서 기독교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윤동주의 시는 탄생과정에서부터 결코 기독교와 분리될 수 없다. 영화가 이점을 부각시키지 않은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영화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시인으로서 윤동주를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지적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에서 핵심 가치로 소개되고 있는 부끄러움이라는 주제 자체는 굳이 기독교 이미지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기독교적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성 

대중성 

기독교적 가치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화선교연구원의 소식 받기

* 페이스북 www.facebook.com/cricum << 클릭 후 페이지 '좋아요'를,

* 카카오스토리 story.kakao.com/ch/cricum << 클릭 후 '소식 받기'를 누르시면 새롭고 유익한 글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